시스템의 하얀 방에서 인간의 먼지를 찾아서

[김성아의 기술 이후의 건축가] ⑥ 인간 이후의 건축
글. 김성아  에디터. 정지연

 

[김성아의 기술 이후의 건축가] 기술은 최적화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만듭니다. AI는 가능성이 높은 선택을 고르고, 인간은 가능성이 없어도 마음이 끌리는 길을 택합니다. 이같은 비합리성은 결함이 아니라 창조의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은 이 감정적 필연 위에서 태어나기에 기술의 시대에도 건축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재는 건축을 둘러싼 기술적 변화의 과정에서 건축가라는 존재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 지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글 싣는 순서.
① 도구를 넘어 사유로 – 건축가의 새로운 손
② 창조자에서 조율자로 – 건축가의 초상
③ 보이는 공간에서 작동하는 공간으로 – 가상성 시대의 건축가
④ 세계를 감당할 방식을 작곡하는 건축가 – 저자성(authorship)의 재배치
⑤ 흐름과 환상, 그리고 스캔되는 실존 – 공간 이후의 건축 
⑥ 시스템의 하얀 방에서 인간의 먼지를 찾아서 – 인간 이후의 건축

 

“당신이 나를 만들었다면, 당신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 영화 ‘에일리언: 커버넌트(Alien: Covenant)’ 중, 안드로이드 데이빗의 질문

 

문이 열리는 순간, 공기의 질감이 증발한다. 그 공간에는 인간의 거주를 증명하는 냄새도, 온도도, 시간의 흐름을 지시하는 먼지의 궤적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영화 ‘에일리언: 커버넌트'(2017)의 오프닝,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눈을 뜨는 ‘하얀 방’은 건축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극단적인 형상이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을 담기 위한 ‘그릇’이 아니라, 오직 정보의 무결성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으로서의 공간이다.

그 안에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회화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놓여 있다. 그러나 이 걸작들은 감상의 대상이라기보다 정교하게 샘플링된 데이터의 파편처럼 보인다. 한때 인간의 감각과 신체, 신념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형상들이 이제는 맥락을 잃고 박제된 정보로 존재한다. 르 코르뷔지에가 ‘빛 속의 순수한 형태’를 통해 인간의 삶을 찬란하게 드러내려 했다면, 이 하얀 방은 빛을 통해 모든 인간적 흔적을 소거한다. 여기서 빛은 드러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적인 잡음(Noise)을 지워버리는 소거의 장치로 작동한다.

 

영화 ‘에일리언: 커버넌트'(2017)의 오프닝 장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회화 ‘탄생 Natività’이 벽에 걸려 있다. <이미지 출처=영화사 공개 자료>

 

이 장면은 건축의 근간을 이루던 비트루비우스(Vitruvius)적 질서의 종말을 선언한다. 서구 건축사의 뿌리인 비트루비우스 이후 건축은 늘 ‘인간의 몸’을 척도로 삼았다. 기둥의 높이는 인간의 신장과 비례해야 했고, 창문의 위치는 인간의 시선에 맞춰졌다. 건축은 ‘죽음’과 ‘풍화’를 겪는 인간을 보호하고 기념하기 위한 물리적 외피였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는 안드로이드에게 시간은 의미를 잃는다. 시간이 필요 없는 존재에게 풍화와 기억, 흔적은 불필요한 잉여일 뿐이다. 이때 건축은 시간을 견디는 구조물이 아니라, 시간을 박탈당한 채 영원한 현재만을 반복하는 ‘환경적 프로토콜(Environmental Protocol, 즉 기계가 작동하기 위해 최적화된 상태)’로 변모한다. 이것이 ‘인간 이후(Post-Human)’의 건축이 마주한 첫 번째 풍경이다.

 

영화 ‘에일리언: 커버넌트'(2017)의 오프닝 장면 중 데이빗의 선언 <이미지 출처=영화사 공개 자료>

 

우리는 흔히 현실이 가상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가 원본보다 더 실제 같은 복제물, 즉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단언했다.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네는 “실재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대사는 우리가 ‘진짜’라고 믿었던 모든 시각적, 감각적 질서가 사실은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코드의 산물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의 공포를 의미한다. 영화 속 ‘컨스트럭트(The Construct)’라 불리는 하얀 방에서 가구와 공간은 재료의 물성이 아니라 호출된 데이터의 시각화일 뿐이다. 오늘날의 건축가는 이 ‘컨스트럭트’의 설계자와 닮아간다. 건축가는 더 이상 돌과 나무의 성질을 탐구하지 않는다. 대신 화면 속의 매끄러운 픽셀과 수치화된 파라미터를 조정한다.

 

영화 ‘매트릭스'(1999)에 등장하는 ‘컨스트럭트(The Construct)’라 불리는 하얀 방 <이미지 출처=영화사 공개 자료>

 

이러한 ‘실재의 사막’은 명품 매장의 매끄러운 유리 외벽 너머로 확장된다. 애플 스토어의 결벽증적 미니멀리즘은 건축의 ‘구축성(실제로 건물을 쌓아 올리는 물리적 논리)’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다. 거대한 유리판을 지지하는 복잡한 구조체와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데이터 케이블은 벽체 아래 완벽하게 매립된다. 사용자가 경험하는 것은 기술적 복잡함이 아니라, ‘마법처럼 구현된 깨끗한 이미지’다.

 

애플 스토어 홍대점 <사진 출처=나무위키>

 

뉴욕의 ‘베슬(The Vessel)’ 역시 마찬가지다. 이 구조물은 특별한 기능이 없다. 오직 ‘올라가서 사진을 찍기 위해’ 존재한다. 베슬은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 인스타그램이라는 디지털 영토에 업로드되기 위한 거대한 배경화면에 가깝다. 실재하는 공간이 디지털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한 보조 장치로 전락한 것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공간을 탐험하는 주체가 아니라, 공간이라는 기호를 소비하는 객체가 된다. 실재는 기호의 복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구실로 전락한다.

이처럼 공간이 ‘이미지’와 ‘데이터’로 치환되는 흐름은 필연적으로 설계 주체의 변화를 불러온다. 소위 ‘AI 설계’라 불리는 것들은 도면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지능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개입이 사라진 데이터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적인 문법에 가깝다. 우리가 프롬프트에 입력하는 ‘모던한’, ‘효율적인’, ‘수익성 높은’이라는 수식어에는 건축가의 의지가 담겨 있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 모델이라는 기계적 질서가 건축을 그저 기호로 인식하고 확률적으로 배치한 결과물일 뿐이다.

많은 실무자는 이 변화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다. 설계 자동화를 그저 성능 좋은 ‘복사기’ 정도로 이해하며, 낡은 관습 위에 데이터만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에는 생명력이 없다. 클릭 한 번으로 생성된 수천 개의 대안과, 실제로 땅 위에 세워져야 할 건축물의 물리적 무게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은 마치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입에 문 것처럼 공허하다. 이 공허함은 단순히 도구의 미숙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설계의 주체가 ‘인간의 삶’에서 ‘연산의 효율’로 통째로 옮겨갔기 때문에 발생한다. 기계적 문법이 설계의 중심을 차지하는 순간, 건축은 더 이상 사람의 온기를 담아내는 그릇이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연산의 질서 속에서 태어난 건축은 더 이상 ‘거주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설계, 구조, 설비 등의 모든 변수가 블랙박스 안에서 오직 효율로만 수렴될 때, 이렇게 생성된 건축물은 사람이 아닌 기계가 읽기 위해 조직된 하나의 시스템이 된다. 우리는 여전히 생성된 이미지라는 그림자를 만지며 그것이 건축의 실재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설계의 주도권은 이미 인간의 직관을 떠나 연산의 질서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형태’의 위상은 처참하게 몰락한다. 이제 형태는 창작자의 영감이 빚어낸 산물이 아니다. 일조, 에너지, 법규라는 수많은 변수를 계산하고 남은 ‘잔여물’에 불과하다. 건물은 건축가의 철학이 담긴 선언문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연산 끝에 뱉어낸 해석 결과값이 되어버렸다.

 

토마스 헤더윅이 설계한 뉴욕의 ‘베슬Vessel’ <이미지 출처=Epicgenius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7449661>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경계는 재료의 교체나 공법의 진화와 같은 기술적 국면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방식의 이동이다. 인간 이후의 건축(post-human architecture)이라 부를 수 있는 이 국면에서 건축은 더 이상 인간의 감각과 의도, 상징적 표현만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가상과 실재, 데이터와 물질, 알고리즘과 윤리가 서로의 영역을 잠식하는 지형 위에서 건축은 하나의 신전처럼 서 있다. 다만 그 신전은 인간을 위한 제의의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기계적 독해를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고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피에타’가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비례를 문제 삼아 수군댔다고 한다. 성모의 몸집에 비해 그리스도의 몸이 작지 않느냐는 의문이었다.

 

“그 입 다물라. 너희들 보라고 만든 게 아니라, 주님께서 보시라고 만든 거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그것이 인간의 눈높이를 기준으로 조정된 비례가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God)의 시점을 고려한 구성임을 암시했다 한다. 실제로 위에서 본 피에타의 비례는 완벽하다. 설령 그 이야기가 후대의 덧붙임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관점의 문제다. 조각은 단지 정면에서 감상하기 위해 놓인 것이 아니었다. 특정한 위치, 특정한 시선, 특정한 존재를 전제한 비례 체계였다.

오늘날의 BIM(건축 정보 모델링)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디지털 모델의 점과 선, 면과 객체에 집요할 만큼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너는 벽체다. 너는 창호다. 너는 구조체다”. 이러한 의미 부여는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문이 아니다. 그것은 기계가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된 언어다. 건축 요소 하나하나를 의미론적 객체로 지정하는 일은, 알고리즘이 그들을 인식하고 연산하며 교환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전제 조건이다.

그래서 BIM 설계는 표면적으로는 사람의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계를 향해 열려 있다. 우리는 객체에 계보를 부여하고 관계를 설정하며 충돌 규칙을 정의한다. 이 체계는 인간이 도면을 바라보듯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자의적 해석을 최소화하고, 계산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조다. 한국 건축계에서만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 즉 납품용으로 요구되는 형식적 BIM과, 실제로 알고리즘이 작동할 수 있는 데이터 모델 사이의 간극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자는 인간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외피에 가깝고, 후자는 기계적 연산을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다.

따라서 BIM은 도면을 미려하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가상과 실재를 동일한 구조 안에 묶어두는 체계다. 설계, 구조, 설비, 공정, 원가, 유지관리의 변수들이 하나의 데이터 구조 안에 수렴되고, 그 위에서 AI가 작동한다. 이때 건축은 더 이상 보여주기 위한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다른 존재—알고리즘과 기계—가 읽기 위해 조직된 체계가 된다. 우리는 여전히 도면이라는 그림자를 이해할 뿐, 모델의 심층에서 작동하는 데이터 질서를 전부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질서는 점차 설계의 실제 권력을 이동시키고 있다.

AI 설계 자동화는 이 흐름을 더욱 밀어붙인다. 그것은 이미지를 생성하는 단계에 머물지 않는다. 정보의 순환 체계를 구성한다. 설계 단계에서 생성된 모델은 구조 해석과 에너지 시뮬레이션, 로보틱 시공 데이터로 이어지고, 완공 이후의 운영 정보와 다시 결합된다. 그 결과는 학습 데이터로 축적되어 다음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된다. 건축은 완결된 오브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시스템으로 전환된다.

이 변화 속에서 형태의 위상도 달라진다. 인간 이후의 건축에서 형태는 창작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상징적 표식이라기보다, 복수의 변수들이 교차한 결과로 나타난다. 일조, 에너지, 탄소 배출, 공정 비용, 도시 맥락, 구조 효율, 법규 조건, 사용자 데이터. 수많은 조건들이 상호작용한 끝에 도출된 해(解)가 곧 형태가 된다. 건물은 하나의 선언문이라기보다, 알고리즘의 해석 결과에 가깝다.

 

St. Elmo의 성형 요새 by Dion Hinchcliffe. <이미지 출처=플리커, 위키미디어>

 

그렇다면 건축가는 어디에 서 있는가. 선을 긋는 손은 점차 자동화되고, 계산은 기계가 수행한다. 대신 건축가는 변수의 가중치를 설정하는 존재로 이동한다.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 무엇을 계산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대신 도시적 개방성을 희생할 것인가, 혹은 구조적 합리성을 일부 양보하고 공간적 여백을 남길 것인가. 이 선택은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판단을 요구한다.

AI는 해답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질문을 던질지, 어떤 조건을 문제로 삼을지 결정하지 않는다. 그 정의의 영역에는 여전히 인간이 남아 있다. ‘인간 이후의 건축’은 인간을 축출하는 시나리오라기보다, 인간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인간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직접 그리는 존재가 아니라, 체계의 윤리와 방향을 설정하는 존재가 된다.

결국 문제는 기술의 정교함이 아니라, 어떤 세계를 계산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있다. 탄소 배출은 변수로 입력되지만, 기억은 어떻게 모델링할 것인가. 유지관리 비용은 예측 가능하지만, 공동체의 상처나 장소의 역사성은 어떤 데이터 구조에 담을 수 있는가. 인간 이후의 건축은 인간을 배제하는 건축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다시 정의할 것인지 묻는 장이다. 인간의 감각과 기계의 연산이 동시에 응시하는 자리에서, 건축은 두 시선 사이의 긴장을 견디며 서 있어야 한다. 그 긴장을 조율하는 역할, 바로 그 지점이 오늘날 건축가에게 남겨진 자리다.

건축은 오랫동안 인간 육체의 확장(Extension)이었다. 비트루비우스의 정교한 비례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은 주체(Subject)를 보호하고 고양하기 위한 물리적 외피로 존재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경계는 재료의 교체나 공법의 진화와 같은 기술적 국면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방식의 이동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기술에 대한 질문(Die Frage nach Technik)’에서 현대 기술의 본질을 ‘몰아세움(Ge-stell)’으로 정의했다.

*출처 : 유희석, 하이데거의 ‘Ge-Stell’에 관하여: 과학기술과 서사예술, ‘비평과 이론’ 제31권 1호

여기서 ‘몰아세움’이란 자연과 인간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부품(Bestand)’으로 간주하여 정돈하는 강제적인 틀을 의미한다. 현대 건축은 이제 인간의 감각과 의도를 데이터의 파편으로 전치시킨다. 가상과 실재, 알고리즘과 윤리가 서로를 잠식하는 지형 위에서 건축은 하나의 신전처럼 서 있다. 다만 그 신전은 인간을 위한 제의의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기계적 독해를 위한 장치이다. 이제 설계자라는 저자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인간의 공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혀 다른 층위의 생태계이다.

우리는 건축을 흔히 ‘거주하기 위한 기술’로 이해한다. 하지만 건축의 역사 속에는 인간의 삶과는 무관하게 오직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간을 재구성했던 냉정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565년의 몰타 공방전(Great Siege of Malta)이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과 성 요한 기사단이 벌인 사투는 벽을 쌓는 행위가 아니라 공간을 ‘연산’하는 과정이었다.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땅을 파고 들어가는 지하 갱도, 적의 진입을 늦추기 위해 설계된 복잡한 참호망과 성형 요새(星形要塞 Trace Italienne)의 기하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집’의 문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나 안락함이 아니라, 오직 ‘파괴의 효율성’이라는 목적 함수(Objective Function)에 의해 결정된 공간이었다. 포탄의 궤적을 계산하여 꺾인 성벽의 각도는 인간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몰타 공방전(Great Siege of Malta)을 묘사한 회화 by Matteo Pérez <이미지 출처=위키미디어>

 

현대의 알고리즘 건축은 이 공성전의 논리를 디지털로 계승한다. 오늘날의 물류 센터나 데이터 센터를 떠올려 보자. 그곳의 층고와 동선은 인간의 보행 속도가 아니라 로봇의 팔이 닿는 거리와 서버의 냉각 효율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은 그 안에서 중심적인 거주자가 아니라, 시스템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는 ‘변수’에 불과하다. 건축이 ‘지어지는 것’에서 ‘계산되는 것’으로 이행할 때, 공간은 더 이상 인간의 감각에 호소하지 않는다. 대신 기계가 읽기 가장 좋은 해상도로 해체된다. 이것은 건축의 프롤레타리아화(Proletarianization)이다. 기술 철학자,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가 말했듯, 기술이 인간의 지식을 외재화하여 기계 속으로 집어넣을 때, 인간은 그 기술의 주체성을 잃는다. 건축가 역시 자신의 직관과 감각을 알고리즘에 넘겨줌으로써, 공간을 ‘느끼는 자’에서 데이터를 ‘선별하는 자’로 이동하고 있다.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ZHA)의 연구 조직인 ZHA CODE가 수행하는 설계 실험은 이러한 ‘인간 이후’의 방법론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유니티(Unity)와 같은 게임 엔진 속에서 수만 명의 가상 에이전트(Agent)들에게 공간을 ‘학습’시킨다. 이 에이전트들은 인간처럼 공간의 분위기를 감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최단 거리’, ‘가장 넓은 시야’라는 보상(Reward)을 얻기 위해 기계적으로 공간을 배회한다. 이 가상 존재들의 발자국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경로는 곧 벽이 되고 지붕이 된다. 이렇게 탄생한 건축물은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기묘한 기하학을 띤다.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는 이를 ‘파라메트릭 세미올로지(Parametric Semiology, 매개변수에 기반한 기호학)’라고 불렀다. 건축을 형태가 아니라 ‘기호 체계’로 보겠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이 기호는 인간의 눈이 아니라 기계의 센서가 읽기 위해 존재한다. 벽은 더 이상 공간을 나누는 칸막이가 아니라 정보의 흐름을 조절하는 ‘저항값’이 된다.

 

에이전트의 공간 학습에 의한 디자인 사례 <이미지 출처=https://patrikschumacher.com/parametric-order-architectural-order-via-an-agent-based-parametric-semiology>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시티(NEOM – The Line)’는 건축이 어떻게 인공지능의 연산적 유토피아로 화(化)하는지를 보여준다. 170km에 달하는 거울 외벽은 주변 자연을 반사하며 자신을 지우는 동시에, 그 내부를 완벽하게 통제된 디지털 환경으로 채운다. 네옴시티는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운영 체제(OS) 위에 세워진 하드웨어다. 거주자의 모든 움직임은 데이터로 변환되어 도시의 알고리즘을 피드백하고, 도시의 모든 공간은 최적화된 연산의 결과로 재배치된다.

 

Neom City <이미지 출처=나무위키>

 

이러한 시뮬라크르의 지배가 정점에 도달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신경학적 자기 객체화(Neurological Self-Objectification)’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은 우리가 스스로를 내면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데이터 수치로 분석 가능한 ‘객체’로 보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출처 : 마르쿠스 가브리엘 (전대호 역) 2018. ‘나는 뇌가 아니다’

스마트 홈 시스템이 나의 수면 패턴을 분석해 조명을 조절할 때, 나는 공간을 주도적으로 점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최적화되는 ‘데이터 포인트’로 전락한다. 건축이 인간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건축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데이터를 공급하는 배터리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기계적 완벽함의 시대에, 우리는 다시금 ‘인간적인 것’의 본질을 묻는다. 건축에서 ‘완벽’이라는 단어는 흔히 기하학적 결점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의 연주에서 목격하는 완벽은 그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근원적인 층위에 닿아 있다. 그의 연주는 마치 잘 설계된 고딕 성당의 가느다란 석조 기둥처럼 위태롭고 정교하다. 미켈란젤리는 단 한 음의 타건도 우연에 맡기지 않는다.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소리는 감정의 과잉이 거세된, 오직 음의 물리적 진동과 시간의 간격만이 남은 ‘결정체’다.

이러한 ‘정밀함의 미학’은 바흐(J.S. Bach)의 음악적 구조와 공명한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은 악기가 지정되지 않은 채 오직 수학적 대위법의 원리만으로 기술된 설계도다. 여기서 음악은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와 논리를 소리로 구현한 건축적 구축물이다. 현대 건축에서 크리스티안 케레츠(Christian Kerez)나 피터 춤토르(Peter Zumthor)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 서 있다.

AI가 내놓는 최적해(Solution)가 수많은 데이터 사이의 통계적 타협점이라면, 케레츠의 건축은 단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가 건물 전체를 지배하게 만드는 ‘개념적 결정론(Conceptual Determinism)’의 산물이다. 그는 건축가가 형태를 ‘고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명료한 논리를 설정하고 그 논리가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존재임을 증명한다.

그의 대표작인 ‘로이첸바흐 학교(Schulhaus Leutschenbach)’에서 구조는 공간을 지지하는 보조 장치가 아니다. 건물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강철 트러스는 그 자체가 건축의 외피이자, 평면을 결정하는 문법이며, 공간의 정체성이다. 여기서 건축가는 ‘무엇을 더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이 구조적 논리가 도달할 수 있는 끝은 어디인가’를 묻는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시스템으로서의 하얀 방’과 닮아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AI의 시스템이 블랙박스 안에서 최적의 효율을 계산해 낸 결과라면, 케레츠의 시스템은 투명하게 공개된 논리의 극단이다. 그는 구조적 필연성을 통해 공간에 ‘논리적 숭고(Logical Sublime)’를 부여한다. 사용자는 그 압도적인 구조 아래에서 기계적 효율이 아닌, 하나의 사고 체계가 물리적 실체로 변모했을 때 발생하는 전율을 경험한다.

 

Schulhaus Leutschenbach by Christian Kerez <이미지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5774475>

 

201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인시덴탈 스페이스(Incidental Space)’는 ‘인간 이후의 건축’이 나아가야 할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는 수만 장의 디지털 스캔 데이터와 시뮬레이션을 활용하여, 인간의 직관으로는 설계할 수 없는 복잡한 구름 모양의 내부 공간을 구축했다. 겉보기에는 알고리즘이 뱉어낸 무질서한 형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제작 가능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의 의도를 단순히 자동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이 닿지 않는 ‘비참조적 공간’을 탐사하는 탐침이 된다. 케레츠는 디지털의 매끄러운 연산 결과를 석고라는 거친 물성으로 치환함으로써, 데이터에 ‘촉각적 실재감’을 부여한다.

 

Incidental Space. A project by Christian Kerez, curated by Sandra Oehy. <이미지 출처=아키데일리, ©Laurian Ghinitoiu>

 

케레츠의 작업 방식은 미래 건축가의 정의를 다시 쓰게 만든다. 그는 선을 긋는 대신 ‘제약 조건(Constraints)’을 설계한다. “하나의 벽으로 된 집”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단 하나의 벽’이라는 극단적인 제약을 설정하고, 그 제약이 빚어내는 공간의 변주를 정교하게 조율한다. 이것은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행위와 유사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의도적 엄격함’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알고리즘이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대안을 제시할 때, 케레츠는 가장 ‘논리적인’ 길을 택한다. 그는 건축을 ‘해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질문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투쟁’으로 본다.

결국 케레츠의 건축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이 연산 가능해진 시대에, 우리는 기계의 확률적 선택에 몸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지독한 논리적 필연성’을 통해 공간의 존엄을 지켜낼 것인가. 그의 정밀한 구조체는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마지막 논리의 닻이다.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이미지는 ‘완벽한 질감’을 흉내 내지만, 그 안에는 무게도, 온도도, 냄새도 없다. 그것은 시각이라는 단일 감각을 위해 정제된 데이터의 나열일 뿐이다. 반면 춤토르의 건축은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물질적 실재(Physical Presence)’의 힘을 통해, ‘인간 이후’의 기술적 공허함을 메우는 가장 강력한 바리케이드가 된다.

춤토르의 ‘테르메 발스(Therme Vals)’는 단순히 돌을 쌓은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에서 채취한 6만 장의 쿼츠사이트(규암) 판을 바흐의 대위법적 구조처럼 치밀하게 엮어낸 ‘물질의 푸가’다. AI 설계가 평면의 효율을 위해 벽의 두께를 최소화할 때, 춤토르는 벽을 하나의 거대한 ‘지층’으로 설계한다. 여기서 석재의 겹침은 시각적 패턴이 아니라,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온 대지의 무게를 공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다. 디지털 렌더링 속의 매끄러운 돌은 결코 보여줄 수 없는, 물과 돌이 만날 때 발생하는 온도 차이와 습기 어린 공기의 무게감은 오직 현상학적 실재 안에서만 완성된다. 이것은 알고리즘이 연산할 수 없는 ‘감각의 해상도’다.

 

Bruder Klaus Field Chapel의 내부, 설계 피터 춤토르. <이미지 출처=https://vals.ch/en/enjoy/wellness/7132-therme>

 

춤토르가 추구하는 건축의 미학은 ‘파티나(Patina, 세월의 흔적)’에 뿌리를 둔다. ‘브루더 클라우스 필드 채플(Bruder Klaus Field Chapel)’에서 그는 112그루의 나무 거푸집을 세우고 콘크리트를 타설한 뒤, 내부의 나무를 서서히 태워 없앴다. 그 결과 남은 것은 불에 탄 나무의 거친 질감과 그을린 냄새, 그리고 사라진 존재의 ‘공백’이다.

디지털 세계에는 ‘삭제’는 있어도 ‘소멸’은 없다. 모든 데이터는 언제든 복구 가능한 상태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시간은 가역적이다. 그러나 춤토르의 건축은 ‘비가역적인 시간’을 공간에 새긴다. 불에 타버린 나무의 흔적은 기계적 로그 파일(Log file)이 아니라, 공간이 겪어낸 고통스럽고도 성스러운 제의의 기록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안드로이드의 하얀 방에 대항하여, 춤토르는 ‘죽음(풍화)을 수용하는 건축’이 인간을 어떻게 다시 대지로 불러내는지 보여준다.

AI가 끊임없이 대안을 생성하며 정보를 생산할 때, 춤토르는 침묵을 설계한다. 그는 공간의 모든 부재가 필연적인 이유를 갖도록 조율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적을 건축의 핵심 요소로 삼는다. 미켈란젤리가 피아노의 음색을 조율하듯, 춤토르는 빛이 들어오는 틈새의 각도와 재료가 부딪히는 접합부의 간격을 조율하여 ‘공간의 주파수’를 맞춘다. 이 정밀함은 효율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주자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실존적 여백’을 위한 것이다. 기술이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최적화된 경로로 ‘몰아세울’ 때, 춤토르의 공간은 우리를 멈춰 서게 만든다. 차가운 금속 난간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의 감각,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산란되는 빛의 궤적은 기계가 스캔할 수 없는 인간적 고독의 자리다.

춤토르의 건축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건축의 본질은 ‘보여주는 이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주하는 육체’의 경험에 있다는 것을. 알고리즘이 아무리 정교하게 공간을 계산해낼지라도, 바닥에 발을 디딜 때 느껴지는 석재의 단단함이나 나무가 풍화되며 내뿜는 향기까지 설계할 수는 없다. 결국 춤토르라는 이름은 기술 시대에 건축가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를 상징한다. 그것은 기술의 정밀함을 이용하되 그 노예가 되지 않고, 오히려 기술이 포착하지 못하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공간 속에 붙잡아 두는 일이다. 무결한 데이터의 세계 너머, 여전히 땀 냄새와 먼지, 그리고 거친 마찰력이 존재하는 그곳에 인간의 진정한 거주가 있음을 그는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정밀함이 투쟁을 거치지 않은 결과라면, 건축가의 정밀함은 실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끝내 실수하지 않으려는 긴장 속에서 형성된다. 기계는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계산할 뿐이다.그래서 오늘의 건축가는,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무결한 정확성 위에 또 다른 층위를 더해야 한다. 미켈란젤리가 사소한 조율에까지 쏟아부었던 집요함과 같은, 의도된 엄격함이다. 그 엄격함은 효율을 향하지 않는다.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끝까지 밀어붙이게 만드는 힘, 다시 말해 논리가 스스로를 극한까지 밀어 올릴 때 비로소 드러나는 숭고에 가깝다. 생성형 AI가 제안하는 평면은 수학적으로 ‘무오류’에 가깝다. 동선은 최단 거리로 연결되고, 일조량은 최적화되며, 구조적 효율은 극단에 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물들 앞에서 기묘한 공허함을 느낀다. 이 공허함의 정체는 ‘필연성의 부재’에 있다. 알고리즘은 ‘확률’에 기반해 최적해를 찾지만, 왜 그 벽이 반드시 그곳에 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이유는 제시하지 못한다. 알고리즘이 만든 공간은 마찰이 제거된 ‘무균실’과 같다. 모든 것이 매끄럽게 해결된 공간에서는 인간의 시선이 머물 자리가 없으며, 기억이 고착될 마찰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Bruder Klaus Field Chapel의 내부, 설계 피터 춤토르 <이미지 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726363>

 

캐나다 토론토의 ‘사이드워크 토론토(Quayside)’ 프로젝트나 싱가포르의 HDB(주택개발청) AI 설계 실험 등의 프로젝트들은 일조량, 바람길, 보행 효율성을 극대화한 평면을 AI로 도출했으나, 결과적으로 “기계적이고 통제된 환경이 인간의 우발적인 만남을 차단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인간이 우연히 멈춰 서서 이웃과 마주치거나 계절의 변화를 감각할 수 있는 ‘의도적 잉여(Intentional Excess)’가 완전히 소거되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리는 공연 직전 조율사가 완벽하게 조율해 놓은 피아노를 다시 붙잡고 수 시간을 보냈다. 기계적으로 완벽한 음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해석이 담길 ‘의도적 음색’을 위해 다시 조율을 요구했다. 건축 실무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가 요구된다. 미래의 건축가는 형태의 생성자(Generator)가 아니다. 미래의 건축가는 그 무한한 가능성 사이에서 ‘논리적 필연성’을 부여하는 ‘편집자(Editor)’이자, 공간의 주파수를 맞추는 ‘조율사(Tuner)’가 되어야 한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건축은 역설적으로 가장 순수한 ‘판단의 예술’로 남는다. AI가 ‘어떻게(How)’를 최적화할 때, 건축가는 ‘왜(Why)’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든 것이 스캔되고 객체화되는 시대에, 건축가는 스캔되지 않는 인간의 고독과 영감을 지키는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의도적 비효율’이다. 빛이 벽면의 미세한 마모를 비출 때 느껴지는 장소의 깊이나, 난간의 차가운 금속성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의 정적 같은 ‘감각의 잉여’를 공간의 뼈대 속에 다시 새겨 넣어야 한다. 데이터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적 고독의 자리를 남겨두는 것. 그것이 기술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건축가라는 주체를 요청해야 하는 이유다.

건축가는 기능적으로 완벽한 동선 속에 의도적인 머뭇거림을 배치하거나, 물성(Materiality)의 대비를 통해 기계가 스캔할 수 없는 ‘정서적 해상도’를 높여야 한다. 물성은 단순히 재료의 선택이 아니라, 디지털의 매끄러움에 대항하는 인간적 저항의 표시다. 우리는 데이터가 흐르는 파이프라인 위에 인간의 감각이 걸려 머물 수 있는 ‘걸림돌’을 설계해야 한다.

인간 이후의 건축을 논할 때 가장 핵심적인 화두는 ‘기억의 보존 방식’이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데이터를 생산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쉽게 기억을 잃어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데이빗이 보여주는 기억은 ‘로그 파일(Log File)’이다. 그는 2000년 전의 시를 암송하지만, 그 시가 품고 있는 비극적 정서에 공명하지는 못한다. 반면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 로이 배티(Roy Batty)는 죽음의 순간, 자신이 보았던 오리온의 불타는 전함과 탄호이저 게이트의 불빛을 이야기한다. 그 기억은 디지털 서버에 저장될 수 없는, 오직 소멸을 전제로 한 육체적 경험의 흔적이다. 정보와 경험의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인간 이후의 건축이 도달해야 할 지점은 데이터가 포착할 수 없는 ‘소멸의 궤적’을 공간 속에 어떻게 남길 것인가에 있다. 정보 이론의 관점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할수록 불확실성이 커지듯, 건축에서 의미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최적화된 상태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마찰과 우연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다시, 안드로이드 데이빗의 ‘하얀 방’을 떠올려 본다. 그곳이 그토록 공포스러운 이유는 결함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결함이 생길 여지조차 없기 때문이다. 설명될 수 있는 모든 것(데이터)이 공간을 점령한 시대에, 건축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실존)들이 머무는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 우리가 어떤 공간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곳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나의 서툰 시간과 누군가의 땀 냄새, 사라져가는 빛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우리를 영생의 디지털 세계로 초대하겠지만, 건축은 우리를 다시 흙과 먼지, 죽음이 있는 대지로 불러내어 거주하게 할 것이다. 무결한 시스템의 방에 의도적인 ‘먼지’를 뿌리고, 매끄러운 픽셀의 벽에 ‘풍화의 마찰력’을 새겨넣는 일. 기계가 읽을 수 없는 그 비효율의 틈새야말로, ‘인간 이후’에도 우리가 건축가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이유다.

 

김성아 Sung-Ah Kim
성균관대학교 교수로서 건축 설계와 컴퓨팅을 접목하는 연구를 해오고 있다. 미국(Harvard University)과 스위스(ETH)를 오가며 1990년대에 무르익던 설계 자동화와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를 거쳐 2002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영화, 음악, 전쟁사와 지리, 언어 등의 잡학에 관심이 많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 시대의 건축(2021)’, ‘건축학과 교수의 클래식 음악 수첩(202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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