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정화 사진. 브리크 편집팀 기획. 브리크 편집팀 협력. 미드데이 Midday
[브리크 인사이트 토크] 하나의 건축물이 탄생하기까지 현장에는 도시와 공간, 사람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목소리가 교차합니다. 그 이야기 속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축의 진정한 가치가 숨어 있습니다.
<브리크brique>는 올 한 해 격월로 진행하는 ‘브리크 인사이트 토크’를 통해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한자리에 모읍니다. 미학적 접근을 넘어, 한국 건축계가 마주한 실질적인 과제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다음의 건축을 함께 고민하는 담론의 자리입니다.
개별 프로젝트의 파편화된 경험이 유의미한 인사이트로 엮이는 이 대화의 기록이, 여러분에게 깊은 영감과 새로운 힘이 되길 바랍니다. 현장에서 길어 올린 이 질문들은 우리 건축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더욱 뾰족하게 완성시켜 줄 것입니다.
글 싣는 순서.
① 요즈음 건축가의 요즈음 고민 – 국형걸 교수
② 가상 건축: AI가 답변하지 못하는 지점을 찾아서 – 정해욱 건축가

지난 3월 21일 토요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남장에서 ‘브리크 인사이트 토크: 문제적 건축’ 두 번째 회차가 열렸다. 이번 토크는 ‘가상 건축: AI가 답변하지 못하는 지점을 찾아서’를 주제로, 미드데이Midday 공동대표이자 ‘가상-건축’의 저자인 정해욱 건축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강연과 대담, 질의응답, 네트워킹으로 이어진 이번 행사는 ‘AI와 가상 건축’이라는 화두를 통해 오늘날 건축가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 자리로 기획됐다.
연사로 나선 정해욱 건축가는 설계와 연구, 글쓰기를 병행하며 건축이 작동하는 조건 자체를 탐구해왔다. 그는 건축이 단순히 ‘지어지는 물리적 실체’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이 현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깊이 관여한다고 믿는다. 그가 오래 탐구해 온 ‘가상-건축’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현실과 이미지, 실제와 재현이 뒤섞이는 시대에 건축은 과연 무엇을 다뤄야 하는가. 이번 토크는 AI 시대라는 구체적인 조건 위에서 이 질문을 다시 펼쳐 보였다.


리얼리티의 붕괴와 그럴듯함의 역습
정해욱 건축가는 강연의 시작에서 ‘우리는 쓸모없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문장을 던졌다. 이는 건축가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AI가 바꾸고 있는 설계 노동의 조건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선언에 가까웠다. 그는 AI가 설계 도서 생산, 도면 작성, 최적화와 같은 업무를 인간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손 제도에서 CAD로, 그리고 BIM과 자동화 도구로 이어져 온 흐름을 생각하면 설계 생산의 주체가 다시 이동하는 일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정 소장은 이를 ‘리얼리티의 붕괴’라고 설명했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현실이 해체되고 각자가 이미지와 서사를 통해 파편화된 현실을 소비하는 시대에 건축은 바로 그 변화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건물보다 먼저 소비되는 것들
정해욱 건축가는 오늘날 공간 경험의 순서가 바뀌었음에 주목했다. 이제 우리는 건축물을 직접 마주하기 전 이미지를 통해 공간을 먼저 ‘소비’한다. 과거에는 건물이 실존한 뒤 이미지가 그 뒤를 따랐다면 지금은 이미지가 실체보다 앞서 공간의 위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건축은 더 이상 완공 이후에만 작동하지 않는다. 지어지기 전과 그 이후에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작동하는 가상의 실체가 되었다.
AI는 조력자인가, 대체자인가
정 소장은 AI와 건축가의 관계를 ‘도면을 설계하는 존재’와 ‘현실을 설계하는 존재’로 나누어 설명했다. AI는 설계 과정에서 강력한 보조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을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 판단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오히려 AI가 더 빠르고 ‘그럴듯한’ 결과를 만들어낼수록 건축가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길 것인가에 대한 기준은 더욱 중요해진다. 결국 건축가는 도구에 매몰되는 대신 도출된 결과물을 통해 어떤 현실을 구성할 것인지 결정하는 주체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질문 사이에서 드러난 건축가의 자리
청중의 질문은 대부분 한 방향으로 수렴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건축을 계속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이다.
정해욱 건축가는 AI가 설계 이전 단계에 미칠 거대한 영향력을 예고했다. 건축주가 AI를 활용해 요구 조건과 초기 기획안을 스스로 구성하는 구조가 정착된다면 건축가는 창작의 주도권을 쥐기보다 이미 구성된 기획을 실행하고 번역하는 역할로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설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설계가 끝나는 구조’가 현실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건축 교육에 관한 담론도 흥미로웠다. 정 소장은 앞으로 교수의 역할이 지식 전달자에서 학생의 학습을 자극하는 ‘트레이너’로 변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보와 레퍼런스는 AI가 더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 만큼 교육의 핵심은 학생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자극하고 깊이 있는 사고를 이어가도록 돕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 자체보다 지속적으로 사유하고 질문하게 만드는 능력이 건축가의 새로운 경쟁력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건축을 계속 사유해야 하는 이유
이번 브리크 인사이트 토크는 AI 활용법을 전수하는 기술적인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AI라는 거울을 통해 건축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묻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무엇이 건축을 건축이라 부르게 만드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여전히 건축을 사유해야 하는가. 정해욱 건축가는 명확한 해답을 내놓는 대신 질문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 방식으로 대화를 마쳤다. 오늘날의 건축은 단 하나의 정답을 갖기 어렵지만 대신 더 정확한 질문을 품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질문을 각자의 언어로 끈기 있게 이어가는 일임을 각인하는 자리였다.



행사명.
[브리크 인사이트 토크] 문제적 건축 Part 1. 가상건축: AI가 답변하지 못하는 지점을 찾아서
일시.
2026년 3월 21일 (토) 17:00 – 18:30
장소.
연남장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5길 22, 1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