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치앙마이(태국)=김태진 에디터
[환상 너머의 치앙마이] 우리는 오랫동안 치앙마이를 저렴한 휴양지나 디지털 노마드의 낙원으로만 기억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현대적인 건축과 공간들은 태국 사회의 복합적인 구조와 깊은 역사를 정직하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은 치앙마이를 대표하는 세 곳의 공간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태국의 현재를 살펴봅니다.
첫 번째 여정은 ‘태국창의디자인센터(TCDC) 치앙마이’입니다. 일찍이 형성된 디지털 노마드 생태계를 체험합니다. 두 번째는 ‘마이암MAIIAM 현대미술관’입니다. 리노베이션 건축이 보여주는 매끈한 현대성과 사립 컬렉션이 지닌 특수성, 나아가 이면에 자리한 질문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캄 빌리지Kalm Village’를 통해 태국 디자인의 뿌리를 탐색합니다. 아유타야 왕국 시절부터 지배 계층의 고급스러운 미감으로 자리 잡았던 중국식 건축 양식이 현대의 로컬리티와 어떻게 조우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보기 좋은 장소를 나열하기보다 공간의 파사드 뒤에 숨겨진 시스템과 권력, 그리고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이 여정이 독자 여러분에게 태국이라는 나라를 한 층 더 깊게 이해하는 새로운 통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글 싣는 순서.
① 일과 여행의 흐릿한 경계, 치앙마이라는 유목 생태계 — TCDC 치앙마이
② 반사광 경계에서 마주한 치앙마이 — 마이암 현대미술관의 유리 타일이 비추는 것, 감추는 것
③ 태국스럽다는 착각 — 치앙마이 캄 빌리지에서 발견한 문화의 중첩
치앙마이 외곽 산캄팽 도로를 달리다 보면 거대한 은색 장벽과 마주한다. 2016년 낡은 폐창고를 리노베이션해 개관한 ‘마이암 현대미술관 MAIIAM contemporary art museum’이다. 수만 개의 유리 타일이 물결치는 이 건축물은 태국 최초의 국제적 수준을 갖춘 사립 현대미술관으로 불린다.

풍경 속으로 사라지는 건축
건축사사무소 ‘올존 all(zone)’의 건축가 ‘라차폰 추추이Rachaporn Choochuey’는 육중한 폐창고를 정면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거울 타일을 주재료로 선택해 부피를 지운다. ‘사라짐의 미학’을 택한다. 외벽의 거울 조각은 주변의 나무와 하늘과 행인의 움직임을 잘게 쪼개어 반사한다. 건물은 하나의 덩어리로 읽히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의 일부처럼 작동한다.



이 파사드는 태국 전통 사원에서 신성함을 강조할 때 쓰는 ‘그라족 그립(Krajok Kriab, กระจกเกรียบ)’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결과다. 왕실과 사원의 전유물이던 수공예 장식을 공업용 거울 타일로 치환해 공장 외벽에 적용한다. 고정된 기념비 대신 주변과 상호작용하는 ‘반응형 건축’을 지향한 선택이다. 지역 장인들과의 수작업으로 완성된 타일 표면에는 제한된 예산 안에서 노동과 수공예의 가치를 복원하려는 의도가 담긴다.

거울 앞에 멈춰 선 이방인들
미술관에 도착하면 거울은 이중적으로 작동한다. 이곳까지 20여 분을 달려온 택시비보다 입장료가 두 배 가량 비싸다. 이동 과정에서 마주한 정돈되지 않은 보행 환경과 시장 중심의 거리 풍경을 떠올리면 이 가격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파사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이들 중에는 서양인 여행객이 유독 눈에 띈다.
200바트의 입장료는 여행자에게는 가벼운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는 쉽게 넘기 어려운 문턱처럼 느껴진다.
거울은 경계를 흐리는 대신 또 다른 경계를 만든다. 내부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선을 반사해 되돌려 보낸다. 입구를 찾기 위해 건물을 따라 걷는 동안 시선은 계속 표면에 머문다. 안을 들여다보려는 눈길은 매끄러운 외피에 부딪혀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건축가의 선택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 선택이 놓인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라지기 위해 선택한 재료가 특정한 방식의 점유를 강화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지역적 단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은 아닌지 되짚게 된다.


반사광 너머의 태국
이 문턱을 단순한 배제로만 해석하기에는 태국의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 태국은 동남아 경제권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도농 간 격차와 자본 집중이 존재하는 사회로 알려져 있다. 입헌군주제 아래에서 반복된 정치적 불안정 역시 이러한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조건 속에서 사립 미술관과 건축이 작동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이다.
태국은 국가 차원의 현대미술 컬렉션이 거의 없다. 주요 작품은 개인이나 금융기관이 소장한다. 예술 인프라를 민간이 대신하는 상황이다. 이 미술관은 세대 간 단절된 미술 생태계를 잇는 거의 유일한 장치로 기능한다. 미술관 설립자 장-미셸 뵈르들리Jean-Michel Beurdeley가 사재를 들여 미술관을 세운 이유다. 치앙마이에 현대미술관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90년대부터 이어진 자생적 예술 커뮤니티의 축적도 작용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동남아시아를 저렴한 휴양지라는 이미지로 소비해왔다. 그러나 이 미술관의 파사드 앞에 서면 그 인식은 쉽게 균열을 드러낸다. 거울에 비친 이방인의 풍경과 그 너머에 놓인 지역적 단절을 함께 보게 된다. 무엇이 반사되고 무엇이 배제되는지 살펴보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이 도시의 현재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