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커상 간접 수상記

[정해욱의 건축잡담] ①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건축 방법론
<출처=James-Simon-Galerie, photo courtesy of Ute Zscharnt for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글. 정해욱 미드데이 공동 대표 ·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 콜라보레이터

 

들어가며

넓어도 너무 넓은 분야, 자꾸만 흐려져 가는 경계. 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한 최근의 인상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너무 넓어 각자가 서 있는 곳 주변을 제외하고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경계는 갈수록 흐려져 무엇이든 다 해도 될 것 같구요.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즘의 건축가들은 건물과 공간, 풍경과 오브제, 형태와 경험, 실제와 가상을 넘나들고 있고요.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사실은 혼란과 흥미를 동시에 유발하죠. 소비자와 업계 종사자 모두에게요.

전자는 이를테면, 이 프로젝트는 어느 종류의 건축가와 함께해야 하는지부터 고민이 될 듯합니다. 함께 할 건축가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의 종류가 무궁무진 할테니까요. 후자는 ‘내가 하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혹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도 가능하겠죠. 그래서 이 분야는 탐색을 빙자한 여행이 가능합니다. 세계 각지의 건축물을 보러 다니는 그런 여행 말고요. 분야 안에서 이곳저곳을 여행처럼 누비고 다닐 수 있어요.

어느날 문득 ‘내가 건축가로서 가고 있는 길이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과 한국과 이탈리아를 오가고, 산업디자인과 인테리어디자인과 건축 사이를 건너왔죠. 건축 안에서도 최전선의 디지털 실험과 가장 클래식한 건물 설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질문이 많습니다. 경험했던 것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것이 조금 다른 시선으로 이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리크brique>를 통해 연재하게 될 에세이는 이런 저의 경험과 시선을 바탕으로 건축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가벼운 에세이 형식이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질문을 바탕으로, 흔하지 않은 시선을 통해 오늘날 건축을 이곳저곳 들여다 봅니다. 내용은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하지만, 건축에 대한 여러분의 보편적인 상식에 색다른 보탬이 되길 기대하면서요. 건축을 기반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계시는 분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다음 시리즈로 다른 건축가의 여행담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프리츠커라고?!

여느 때처럼 사무실에서 우리의 예측을 한결같이 벗어나는 클라이언트와 씨름하고 있던 평범한 오후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무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어로 오가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궁금했던 우린 지나가는 동료를 붙잡고 무슨 일이냐 영어로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상기된 얼굴로 소식을 전해줬다.

“데이비드가 프리츠커를 받았대!”

맙소사. 발표 날인지도 몰랐지만, 알았다 해도 기대조차 없던 상이다. 그런데 갑자기 벼락처럼 떨어졌다. 물론 내가 받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일조하던 작업이 갑자기 역사의 전당으로 올라간 듯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니, 이게 그 정도였어?’

 

BBC 스코틀랜드 본사, 내부 계단과 공용 공간 <출처=BBC Scotland Headquarters, photo courtesy of Ute Zscharnt for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뭐든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대단함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프리츠커가 발표되기 직전까지 내가 그랬다. 내가 매일 부대끼는 것은 느리게 쌓아온 그의 건축적 성취가 아니라 회사에서의 지리한 일상 업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이번 프리츠커 발표는 무엇보다 나에게 너무 신선한 자극이었다.

나는 데이비드가 프리츠커의 후보에도 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가진 프리츠커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 데이비드는 거기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일단 그에겐 외길을 걷는 고독한 건축쟁이의 느낌이 덜하다. 작업들도 은근히 세속적이고, 참신하다기보단 표면적으로 너무 예뻤다. 게다가 기사작위까지 있는, 가진 것 많은 영국 백인 남성이기도 하다. 요즘 프리츠커는 이런거 별로 좋아하지 않던데.

 

제임스 시몬 갤러리, 독일 베를린 박물관 섬에 새로 신축한 박물관과 주변 건물과의 관계 <출처=James-Simon-Galerie, photo courtesy of Ute Zscharnt for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치퍼필드의 방법론

그렇다고 그의 작업에 일관성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의 커리어에서 일관성을 꼽자면, 사람들은 아마 고전적인 건축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인 우아함으로 승화시키는 지점을 떠올릴 것 같다. 이것은 그의 디자인이 외부로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이다.

회사에 오기 전까진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와 함께 일해보니 그것은 표면에 불과했다. 대신 그 이면에 더 크고 견고한 방법론이 있었다. 바로 건물의 각 요소들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끝까지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그는 의외로 구현된 공간이 만들어낼 현상적 경험에는 그다지 관심 없어 보였다. 대신에 질서의 구축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매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그런 것인가, 여기서 아이디어는 무엇인가.”

 

노이에스 무제움, 독일 베를린 박물관 섬의 신 박물관 건물 리노베이션 내부 <출처=The Neues Museum, courtesy of SPK /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photo Joerg von Bruchhausen>

 

그의 팀은 설득력(plausibility)에 건축 인생을 건 사람들 같았다. 그 설득은 과학적 진리에서 비롯되는 공학적 설득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측면에서 사물의 질서를 쌓는 것에 가깝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 벽은 주요 벽(primary wall)이니까 두께는 얼마 이상이어야 하고, 여기엔 존재할 수 없고, 대신 구조는 이 벽만 담당해야 해. 가장 무거운 재료가 들어가야 할 것 같고, 여기엔 구멍도 뚫릴 수 없어. 이 벽만 평면에 남겼을 때 우리의 아이디어가 드러나야겠지. 하지만 저 벽은 부차적인 벽(secondary wall)이니까 위치는 저기가 말이 되고, 대신 재료는 이게 말이 될 것 같고, 천장과의 관계는 주요 벽보다는 조금 더 떨어져 있는 것으로 설정하자. 구조를 제외한 잡다한 기능은 이 벽이 담당하면 좋겠어. 에어컨이나 배관은 이 벽에다가 넣자.”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세계관 만들기 게임 같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서 모든 요소들을 논리적으로도 감각적으로 모두 말이 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질서 만들기 놀이는 마감까지 이어졌는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 부분은 카데고리상 b보다는 a가 맞는 것 같아. 우리가 a는 돌로 만들기로 결정했지? 이게 돌이라면 돌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저 코너에서 저렇게 꺾이면 안돼. 그게 기술적으로 마감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두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돌이라고 볼 수 없거든. 그건 가짜야. 그럼 돌의 속성을 바탕으로, 다시 a와 b의 관계를 다이어그램으로 정리해볼까? 여기까지가 a의 영역이 되겠네! b와는 이렇게 만나야 하겠고.”

이 돌 사례의 흥미로운 지점은, 로마네스크처럼 돌로 건물을 직접 쌓는 게 아닌데도 돌의 리얼리티를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돌을 가지고 무엇이든 해도 기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세상에서 오히려 돌의 건축문화적 속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 속성은 가상의 속성이지만, 거짓이라 할 지라도 끝까지 밀어붙이면 거기엔 질서가 생겨나게 된다.

이것은 건축물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실제 건물의 아우라로 이어진다. 어딘가 모르게 육감적으로 거슬리는 부분이 아무데도 없게 되는 것이다. 디자인 과정에서 돌이라고 불러놓고 실제 재료는 프리캐스트 콘크리트가 들어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돌처럼 단단하게 존재하게 된다.

 

프로쿠라띠에 베키,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앞 16세기 건물 리노베이션 내부 <출처=Procuratie Vecchie, photo courtesy of Alessandra Chemollo>

 

대체로 이러한 질서는 기능과 별개로 존재한다. 특히 공간의 프로그램을 우선하여 자리매김한다. 여기서 이러한 질서가 진짜 말이 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대신 이 방법론은 잘 이루어졌을 때 생각보다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바로,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건축물이 유효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건축물이 프로그램과 상관없이 본연의 자율적인 생명력을 갖도록 만든다. 중요한 것은 기능은 사라져도 건물은 남는다는 사실이다. 클라이언트라는 존재와 그의 요구도 언제나 건축물 대비 유한할 뿐이다. 그럴 때,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건물이 스스로 말이 되게끔 설득력 있게 존재할 수 있는가. 데이비드는 자신의 방법론을 통해 여기까지 신경쓰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즉, 건축이 가질 순수한 힘을 믿는 것이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의 파사드 <출처=Amorepacific Headquarters, photo courtesy of Noshe>

 

이 방법론 덕분일까, 데이비드는 역사적으로 존속해야 하는 프로젝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늘 부수고 다시 짓는 한국 건축문화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지점이다. 요즘에는 특히 상업적 소비 문화에 의해 건축이 ‘공간이 주는 효과’로 축소되는 경향에 있어서 큰 울림을 전한다. 그의 건축에서 또한 많은 사람들은 공간이 주는 효과에 매료되지만, 막상 데이비드 본인의 관심사는 언제나 그 너머에 있었다.

프리츠커 재단의 의견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넘쳐나는 상업주의와 디자인 과잉, 그리고 과장의 시대에서 언제나 균형을 찾는다’고 데이비드의 건축을 평했다. 이런 가치에게 상이 주어지는 2023년이라니. 이 상의 의미를 괜히 과대 평가해 평생 간직하고 싶어지는 초여름날이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렇게 오래가는 건축을 할 수 있을까.

 


필자. 정해욱

건축스튜디오 미드데이의 공동 대표이며,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 밀란의 콜라보레이터이다.
서울대학교에서 공업디자인을, 독일 슈테델슐레에서 건축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독일 슈나이더+슈마허, 이탈리아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 밀란 등에서 근무했다.
공동 집필한 저서로 <가상-건축 Architecture as Fabulated Reality>와 <Upperhouse-Oriented>가 있다.
현재 건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형식의 프로젝트를 꾸려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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