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윤현기
근현대 건축 유산이나 다름없는 힐튼이 자본이라는 빙산에 부딪혀 가라앉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에 건축계에서는 건물의 건축사적 가치를 알려 결정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4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힐튼이 과연 건축계에만 가치 있는 것일까? 힐튼 철거와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면 많은 사람이 힐튼의 공간을 의미 있게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상하고 탁 트인 중앙 로비, 에메랄드 대리석과 섬세한 마감, 객실에서 보이는 남산 풍경 등에 대한 언급은 대중이 힐튼을 호텔 등급이 아닌 건축적 경험으로 기억한다는 것과 이를 통한 내적 공감대가 있음을 의미한다.
힐튼을 설계한 건축가 김종성은 김중업, 김수근과 함께 한국의 1세대 현대 건축가로 꼽힌다. 힐튼은 사람 그리고 디테일을 향한 김종성 건축가의 집념이 총동원된 공간이다. 건물을 이루는 재료 하나하나 허투루 고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건축물 전면에 입힌 커튼월은 뉴욕 시그램 빌딩의 커튼월을 제작한 플라워 시티 Flour City에 위촉해 당시로서는 최첨단으로 제작했다. 부지가 가진 12m 정도의 경사를 활용해 높은 쪽을 1층으로 두고 지하까지를 호텔 로비로 설계했는데 1층에서도 지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로비와 로어 로비 lower lobby로 각각 나누어 부른다.
로비 천장인 2층에는 채광창을 만들었고 로어 로비까지 큰 오프닝(열린 공간)을 뚫어 높은 층고에서 오는 웅장함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기둥과 계단 난간 등에 쓰인 브론즈는 방위 산업체인 풍산금속에서 황동 시트를 공급받았고, 브론즈 가공 장인이 황산을 도포해 이를 짙은 색상으로 만들었다. 대중의 기억에 깊게 각인된 부분과 김종성의 설계가 절묘히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앞서 언급한 공감대는 프로젝트가 시작된 1978년부터 이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호텔을 구성하는 건축 요소부터 주변 풍경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면서 중년의 신사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 명을 다해서가 아닌,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체를 두고 존폐를 논해야 하는 현실은 여러 아쉬움을 남긴다. 힐튼은 1983년 개관부터 현재까지 크게 변한 것도, 망가진 것도 없다. 여전히 이곳에서 굳건하게 누군가를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