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과 안정감 속에서 보내는 일주일

창의적인 사람들의 아지트 ‘리플로우 제주re:flow Jeju’
©Hyungho Kim
에디터. 최성우 객원  사진. 김형호, 최성우  자료. 크립톤, 크립톤엑스

 

육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허겁지겁 마지막 비행기를 탔다. 잠깐 눈 붙일 새도 없이 착륙. 지칠 대로 지쳐 1층 로비에 들어섰는데 파도식물의 식물들이 나를 반겼다. 이솝의 아로마 향기에 긴장감이 살포시 풀어졌고, 은은한 조명과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라운지를 지나자 함께 머물 이웃들이 나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짐을 팽개쳐 두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방전 상태였는데, 순간 에너지가 샘솟았다. 덕분인지 마무리 못했던 일을 몰입해 빠른 속도로 정리하고, 편안하고 상쾌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라운지에 나와 있는 이웃들과 함께 길 건너 ABC 베이커리로 향했다. 갓 구운 빵과 한 잔의 커피로 충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모닝 커피로 억지로 잠을 깨우던 대도시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경험이었다.

 

상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몰입해 일하도록 돕고, 자연과 사람과 어울려 밀도 있게 쉴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 바로 ‘리플로우 제주re:flow Jeju’에서의 경험이다.

 

리플로우 제주 내부 전경 ©Hyungho Kim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꿈꿔온 작은 마을, 리플로우

리플로우 제주(re:flow Jeju, 이하 리플로우)는 지역 고유의 강점을 살리는 스타트업과 크리에이터 생태계를 연결하는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 플랫폼이다.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크립톤과 도시재생 엑셀러레이터 크립톤엑스, 지역 창업생태계 공간 운영사 크립톤케이(옛 클러스터)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들었다.

크립톤은 그동안 수많은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도운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일을 하고, 즐겁게 몰입해 일하는 사람들이 지역을 오가며 현지 사람들과 교류하며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거점 공간을 오랫동안 꿈꿔왔다. 그 첫 번째 장소로 제주시 탑동을 선택했다.

이곳은 아라리오 뮤지엄, ABC 베이커리, 파도식물, 프라이탁, D&Department, 맥파이 등 여러 크리에이티브 그룹들이 협력해 제주 탑동 원도심 재생의 의미 있는 사례를 만들어 제주도민 뿐만 아니라 제주를 오가는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에 제주공항에서 15분 이내 거리로 육지와의 왕래도 수월하다는 지리적 이점까지 갖춘 장점이 있다.

크립톤은 앞으로도 여러 지역을 오가며 일하는 창조 계층의 특성에 맞춰 철도역, 공항 등이 인접하게 있는 지역에 리플로우를 거점으로 삼을 계획이다.

 

제주시 탑동 ©Sungwoo Choi
디앤디파트먼트 제주 ©Sungwoo Choi
아라리오 제주가 일군 브랜드가 이어지는 탑동 거리 ©Sungwoo Choi

 

몰입과 충전, 워크 앤 스테이 Work & Stay

리플로우는 코워킹 스페이스와 객실이 함께 있는,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몰입과 충전을 위한 워크앤스테이Work & Stay 공간이다.
3년 가까이 디룸d-room으로 운영되던 공간을 재해석해 새롭게 선보였다. 13개 객실 중 1개의 객실은 도내외 스타트업을 위한 사무 공간으로, 또다른 1개는 리플로우 운영팀 사무국으로 변용했고, 11개 객실은 ‘롱 라이프 디자인’ 정신을 그대로 이어냈다. 모습과 용도는 달라졌지만,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라운지를 꾸미는 데에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였다.
이전에는 마을 광장에 나와 있듯 객실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조용히 서로 눈인사 정도 하며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쉬는 공간이었다면, 리플로우는 넓은 핫데스크(공용테이블)와 집중데스크(전화부스)를 두어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도록 일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집중했다.

 

리플로우 제주 코워킹 라운지©Hyungho Kim
객실을 나서면 바로 일하거나 머무는 이들과 교류가 가능하다. ©Sungwoo Choi

 

라운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 바로 조도 조절이다. 시간대별로 3단계의 조도 조절을 통해 분위기는 물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온도도 달라지게 된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업무 진행하는 시간엔 눈이 피로하지 않도록 밝게, 오후 8시가 되면 살짝 어두워지며, 하루 일과를 정리할 시간임을 알린다. 저녁 8시 30분이 되면, 무드등의 간접 조명과 함께 리플로우의 시그니처 색상 중 하나인 보라빛 전등이 밝혀진다.

 

보라빛 조명이 켜진 코워킹 라운지의 밤 모습 ©Sungwoo Choi

 

몰입이 너무 잘 돼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각자 객실로 돌아가 일을 이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래 더 즐겁게 일하기 위해서는 잠시 끊어갈 필요도 있다.

리플로우는 일과를 마치면 코워킹 라운지를 커뮤니티 공간으로 대체해 운용한다. 조도를 낮추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함께 머물고 있는 이웃과 커피나 와인 한 잔 마시며 일과 중 있었던 일들도 나누고, 서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문화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인다. 토크 콘서트 등 짜여진 프로그램보다는 자연스러운 대화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리플로우가 지향하는 방식이다.

게스트하우스의 저녁 풍경을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가볍게 대화를 리드하는 사람이 있고, 이야기 역시 물흐르듯 이어진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 온 사람, 자신의 아이디어를 심화시키기 위해 온 사람,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온 사람 등이 나눈 대화가 새로운 창업의 아이디어로 이어지고, 지역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마디로 창조 계층의 네트워크가 시작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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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계층 Creative Class’은 도시 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가 ‘창조도시 이론’에서 주창한 개념으로, 탈脫 산업사회가 고도화 할수록 창의성을 중심으로 한 기술자, 비즈니스맨, 디자이너, 문화산업 종사자 등의 사람이 늘어남을 의미한다. 선진국은 인구 중 3분의 1, 대도시는 40~50%가 창조계층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전동스크린을 내리면 침실 공간과 구분돼 나만의 집무실이 되는 객실 ©Hyungho Kim

 

“리플로우 제주는 이상적인 마을을 만드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을에는 외부에서 오는 사람도 있고, 주민들끼리도 가는 구역이 달라서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 관광객과 상점 주인으로서 만나기도 하는데요. 리플로우에서는 자연스럽게 서로 이웃이 되어가는 문화가 형성하고 정착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길 바랐어요.” – 전정환 크립톤 이사

 

©Hyungho Kim
©Hyungho Kim

 

가치를 담은 공간, 환경을 생각한 공간 조성

디룸의 롱 라이프 디자인 핵심 가치를 이은 11개 객실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살려 낭비를 최대한 줄였다. 1개의 객실은 6~8명이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과 회의실, 집중데스크로 꾸몄다. 샤워부스, 세면대, 침실 등 기존의 구조는 물론, 천정 조명과 의자는 그대로 쓰고 최소한의 공사를 진행해 불필요한 폐기물 발생을 줄였다.

 

©Hyungho Kim
객실을 활용해 만든 사무공간 ©Hyungho Kim

 

리플로우의 ‘RE:’의 가치를 담아 체류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어매니티에도 환경을 생각하는 제품들과 함께 했다. 폐기한 린넨과 타올에서 나온 재생원료로 만든 제클린JeCLEAN 타월, 폐공병을 재생해서 활용하고 식물성 추출물로 만드는 아로마티카Aromatica 샴푸 등 워시제품, 나무 기반 바이오 소재로 만든 언롤서피스의 리트컵 머그컵, 헌옷 폐자재를 재생한 원료로 만든 플러스넬의 포커스룸 벽과 파티션을 활용하는 등 환경적 측면을 필수로 고려해 공간을 만들었다.

 

헌 옷 폐자재를 재생한 플러스넬 파티션 ©Hyungho Kim
헌 옷 폐자재를 재생한 포커스룸 ©Hyungho Kim
친환경 제품을 활용한 어매니티들. (왼쪽부터) 리트컵 머그(언롤서피스), 빈병(아로마티카), RE:타올(제클린)

 

2023년 여름,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이 모일 장소

리플로우 제주는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깊게 몰입해서 일하고, 제주 로컬과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연결돼 창조적 긴장Creative Tension과 창조적 휴식Creative Relaxation을 경험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전략이다.

누구보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지역에 모인다면, 그 자체가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들썩이게 하는 효과를 낳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2023년 7월 제주를 시작으로 앞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창조적인 사람들이 연결되는 리플로우만의 새로운 일과 쉼, 지역 재생의 방법론을 기대해본다.

 

©Hyungho Kim

 

 

리플로우 제주를 기획하고 만들어 가는 사람들

 

  • 콘셉트 기획 : 전정환 크립톤 이사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로컬서비스본부장, 경영지원유닛장을 역임하고,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센터장을 7년간 수행한 후 2022년 크립톤에 합류했다. <밀레니얼의 반격> 저자이며 ‘커뮤니티 엑스’ 대표이기도 하다.

 

  • 공간 기획 : 선주현 크립톤엑스 이사
    용산 국제업무지구, 송도업무지구, 부산금융센터 등 대규모 복합개발 프로젝트의 PM을 수행했다. 인터콘티넨탈서울 파르나스호텔에서 호텔 개발을, SK디앤디에서 1인 가구 MZ세대를 위한 코리빙 ‘에피소드’의 공간기획 및 PM을 각각 수행한 후, 2022년 도시재생 엑셀러레이터 크립톤엑스에 합류했다. 공간 디벨로퍼 ‘FLAT GROUND(플랫그라운드)’의 대표이기도 하다.

 

  • 브랜딩 디자인 : 아델 플랫그라운드 디렉터
    패션에서 출발해 F&B, 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브랜드 론칭과 리브랜딩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브랜드에 생명을 불어넣어 지속적인 인상을 남기는 비주얼 디렉터이다. 리플로우의 로고와 컬러, 키 비주얼을 비롯해 굿즈와 패키징에 이르는 브랜드 가이드라인을 제작했다.

 

  • 공간디자인 : 김가혜 디렉터
    LINE의 공간디자인팀에서 본사 오피스 및 국내외의 공간 브랜딩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며 기획 및 디자인을 해왔다. 지금은 독립해 다양한 공간과 경험을 디자인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 인테리어 시공 : 이권희 이림아이디 소장
    NHN 판교 신사옥, 스타필드 고양,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에피소드 수유 공용부 등 감도가 높은 대규모 프로젝트의 인테리어 시공을 수행했다. 브랜드와 디자인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기반으로 리플로우 코워킹 스페이스의 시공을 담당했다.

 

  • 지역 콘텐츠 : 고미 크립톤엑스 이사
    제주 언론사 제민일보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부 기자를 거쳤고,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한국기자협회 제48회 한국기자상, 제10회 지역신문컨퍼런스 대상을 받았다. 18년 째 해녀 취재 및 자료 수집하고 있는 제주 문화유산 콘텐츠 전문가이며, 2023년 크립톤엑스에 합류해서 지역콘텐츠 기반의 혁신생태계를 만들고 있다.

 

  • 운영 : 박영주 크립톤케이(옛 클러스터 Kluster) 팀장
    온라인 커머스 기업의 CM으로 활동하다가 제주로 이주해 디룸d-room 초기 셋업을 담당했으며,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 혁신성장사업 총괄매니저를 수행하고 2023년 크립톤의 자회사 크립톤케이에 합류해서 리플로우의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

 

©Sungwoo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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