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다른 고향 ‘주공아파트’

[스페이스 리그램] ⑧ 사라져가는 주공아파트에 대한 기억
다큐멘터리 '고양이들의 아파트' 중 한 장면
글. 김은산  자료.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페이스북 페이지

 

‘기억극장(아트북스, 2017)’, ‘애완의 시대(문학동네, 2013)’, ‘비밀 많은 디자인씨(양철북, 2010)’ 등을 통해 사회적인 분석과 미학적인 시선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작업해온 김은산 작가가 ‘스페이스 리그램space regram’이라는 연재로 <브리크brique> 독자와 대화의 문을 엽니다. 인문학과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한 그는 인문서점 운영과 사회주택 기획, 지역 매체 창간 등을 통해 공간과 사람을 매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한 컷의 사진을 매개로 도시인의 일상을 돌아보는 그의 독특한 시선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짧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기대합니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검색하다 젊은 작가의 프로필에 한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고향은 인터넷.’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어색하게 한 문장에서 만난 듯했다. 작가는 인터넷이 느린 영국과 유럽에서 10년간 유학을 하며 외롭게 지낸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 고향은 ‘관계와 소통의 공간’ 혹은 ‘누군가와 연결되는 장소’인 것 같았다. 물리적인 공간에서는 더 멀어졌지만 고향의 실질적인 의미에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대한 또 다른 정의를 만난 기억이 있다. 재건축으로 사라질 서울 강동구의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라는 독립출판물이었다. 삭막하고 어떤 추억의 장소로 기억될 만한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던 아파트를 ‘고향’이라 부르며 재건축으로 사라지는 아파트 단지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기록한 책이었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는 독립출판물로는 놀라울 정도의 화제를 모았다. 소셜미디어(SNS)에는 주공아파트의 로고를 공유하며 아파트 세대들의 공감과 고백이 이어졌고,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반향을 일으켰다.

 

화제를 모은 독립출판물 시리즈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Storage Book & Film

 

필자가 참여했던 경기도 의왕시의 지역 잡지 작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한 지역주민은 내손동 주공아파트가 자신에겐 또 다른 고향이라고 말했다. 지방에서 경기도로 올라와 처음으로 살게 된 아파트이지만 엘리베이터 없는 저층에 여름이면 모두 문을 열어 놓아 고만고만한 살림살이가 다 보이고, 가까운 놀이터에 아이들이 모여 노는 것을 보며 특별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단지와 단지 사이 나무들이 우거져 도시의 삭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지방에서 살며 경험한 일상을 장소만 바꿨을 뿐 그대로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단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서울과 수도권 지역으로 집중되는 인구와 주거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대규모로 지어진 주공아파트는 공동주택의 대명사가 되었고, 단순한 구조와 획일화된 평면, 표준화된 생활양식을 보급하며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건축적으로 의미있는 평가를 받거나 고려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도시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동체의 장소, 또 다른 고향이었다.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주공아파트의 건축적 특징이 주는 단일성은 공동의 경험으로 이어졌던 듯하다. 비슷한 평수와 동일한 구조가 강제하는 평균적인 삶은 ‘보통의 삶’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 높지 않은 층수는 주변 환경과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아파트 동과 동 사이, 단지들간의 적절한 거리는 일조권과 조망권을 제공하며 어느 정도 독립된 생활을 확보해주었다. 해가 갈수록 무성해지는 나무들과 주변 동네와 어우러진 생활 환경은 도시 생활의 삭막함을 가셔주기도 했다. 급격한 도시화와 생활의 변화 속에서 주공아파트는 사라져가는 공동성의 체험이 가능했던 공간이 아니었나 싶다.

 

2018년 개봉한 라야 감독의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 포스터. 재건축으로 사라져갈 자신의 집에 얽힌 기억을 실제 거주자의 인터뷰로 담았다.
지난 3월 개봉한 정재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고양이들의 아파트’. 재건축으로 살 곳을 잃게 된 고양이들을 통해 공존하는 삶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재개발로 오랜 동네가 사라지고, 재건축으로 주공아파트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고층의 브랜드 아파트들이 들어선다. 새로운 아파트들은 입구부터 주변 지역과 차별화되려는 의지를 보여주며 보안을 이유로 더 높은 장벽을 세우고, 문을 설치하고, 출입을 제한한다. 이 빗장공동체들이 어떤 도시공동체를 만들어나갈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친밀한 일상을 전하는 SNS에는 사라져가는 동네의 골목길과 오래된 아파트의 풍경을 기록한 영상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팔로우하고 있는 피드에는 재건축을 앞두고 이제는 비어버린 구반포주공아파트와 주변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영상이 오늘도 업데이트되었다.

새로운 공간이나 아파트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공동성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건축만의 몫은 아닌 것같다. 그래서 아파트 세대들은 기꺼이 ‘실향민’이라는 이름을 떠안으며 사라져가는 공간의 흔적을 기록하며 공간에 대한 예의를 다하려는 것 같다.

 

2017년 개봉한 정재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파트 생태계’의 한 장면.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를 두고, 서울을 일군 1세대 도시학자부터 아파트가 고향인 아파트 키즈들의 다양한 시각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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