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르게 먹고 신나고 즐겁게 떠들고

[Spot] ③ 영등포구청역 동네 맥주집 ‘펍블랑pub blanc’
ⓒKwak Shin
에디터. 최성우 객원  사진. 곽신  자료. 펍블랑

 

운영자의 입장에서 조망하는 공간 이야기를 담는 시리즈 ‘스팟SPOT’입니다. 브랜딩과 공간감 모두 놓치지 않고 방문객을 새로운 경험으로 이끄는 장소가 그 대상입니다. 운영자를 인터뷰해 공간을 기획하고 구현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피고 그 속에서 나눌 수 있는 지혜를 전합니다.

 

새하얀 천으로 숨겨진 공간

서울 영등포구청 건너편, 간판이 어지럽게 설치돼 있고 아파트와 상가 건물들이 혼재돼 있는 골목길을 걷다보면, 코너에 하얀 천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 눈에 띈다. 덩쿨을 이루고 있는 식물까지 더해져 발걸음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간판으로 보이는 아크릴 판에는 전등 그림만 보인다. 도대체 무슨 공간일까? 조심스레 다가가 문을 열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상업 공간의 고정된 공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거리를 밝히고 있는 동네 맥주집 ‘펍블랑pub blanc’이다.

 

ⓒKwak Shin
ⓒKwak Shin

 

당산동 골목길의 풍경

펍블랑이 위치한 당산동3가 골목은 당산역과 문래역 상권 사이, 영등포구청역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영등포구청, 영등포세무서, 영등포경찰서 등 행정기관이 몰려 있어 영등포구의 중심부에 해당하지만 크게 알려지지 않은 동네다. 핫플레이스라 불리는 장소가 부재하고, 오피스 빌딩과 아파트 등 주택이 많은 평범한 동네 중 하나다.

 

영등포구청역 인근 상가 거리 ⓒSungwoo Choi

 

펍블랑을 운영하는 사장은 직원들과 손님들 사이에서 ‘제비’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인근 양평동에 자주 왕래하게 되면서 당산동과 친숙해졌다. 일을 쉬고 있다가 다시 무언가 시작해야 했을 무렵, 어느 프렌차이즈 맥주집이 급히 처분하면서 생긴 빈 점포와 우연히 인연이 닿았다. 무엇을 할까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덜컥 부동산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무얼하지? 카페를 해야 하나? 밥집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철거부터 하기로 했다. 

 

“일단 하얗게 칠하자. 하얀색 스케치북처럼. 새하얀 스케치북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pub blanc
ⓒpub blanc
ⓒpub blanc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자연스러운

장사를 처음 해보는 터라 모든 과정이 처음이었다. 새로운 동네로 이주한 탓에 마땅히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우연히 알게 된 친환경 페인트 판매상을 통해 페인트 선택부터 조색하기, 칠하는 방법까지 배웠다. 철거 후 하얗게 칠하는 데에 꼬박 2개월이 걸렸다. 계획했던 하얀 스케치북이 완성되었지만, 그럼에도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다. 바로 옆 건물에 카페가 있으니 카페는 하지 않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본래 이 공간이 맥주집이었으니 그 맥락을 이어 맥주집을 하기로 했다.

어떤 맥주를 판매할지 고심하던 중 친구의 소개로 블랑 맥주를 알게 되었다. 제비는 술을 한잔도 못했지만, 맛은 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블랑 맥주는 신기하게도 오렌지와 샐러리 맛, 끝맛은 고수와 오렌지껍질 향이 났다. 맛에서 합격! 블랑Blanc은 프랑스어로 ‘흰색’이다. 게다가 사장 제비가 좋아하는 색깔 역시 흰색이다. 때가 무르익자 퍼즐이 맞춰지듯 자연스럽게 결정됐다. 그런데 맥주 공급업체에서 오히려 반대했다. 주변 상권은 카O, 하O트와 같은 일반적인 맥주만 팔리다는 게 그 이유. 동네 어르신들도 지나가시다가 흰색 맥주집이 어디에 있느냐며 한 마디씩 거든다.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잘 알지만, 제비는 한번 해보고 싶었다. “흰색 맥주집이 어때서!”

 

안 해봤는데, 어떻게 알아요? 해보고 안 되면, 아~ 안되는구나 하고 다른 거 하면 되죠.”

 

ⓒKwak Shin
ⓒKwak Shin
ⓒKwak Shin

 

“여성들이 늦은 시간까지 편히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파트와 다세대, 다가구 주택이 인접해 있는 골목임에도 저녁이 되면 캄캄하다. 혼자 식사를 하거나 가볍게 맥주 한 잔할만한 식당을 찾기도 어렵다. 그저 직장인 회식을 위한 식당과 주점들로만 가득하다. 당산동으로 이사오자마자 했던 메모 중 하나가 “여성들이 혼자 와서 편히 늦게까지 먹고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개인적 바람이기도 했다. 실제로 매장을 운영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지만, 단골손님 중에서 혼자 오시는 여성들이 대다수다.  

ⓒKwak Shin
ⓒKwak Shin

 

배불리 먹고 마음껏 떠들고 가면 충분하다는 운영철학

요리를 배운 적은 없다. 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외식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집에서 해먹는 날이 많아졌다. 메뉴 구성도 집에서 해 먹었던 요리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제비가 할 줄 아는게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집에서 같이 먹었던 떡볶이 맛있었어. 그거 메뉴로 해”라며 추천한 요리들이 메뉴 리스트에 들어왔다. 제비는 손이 크다. 가게를 시작할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 “블랑에 온 손님들이 배불리 먹고 마음껏 떠들고 갔으면 좋겠어요”였다. 이것이 그의 컨셉이자 운영철학이라고 했다. 부족함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 음식이 테이블 앞에 놓일 때마다 손님들의 감탄소리가 이어진다. 말 그대로 산처럼 쌓아서 나온다. 

 

ⓒpub blanc
ⓒpub blanc
ⓒpub blanc
ⓒpub blanc

 

버려질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공간 철학 

철거를 하던 도중 확고한 다짐이 생겼다. 이 곳을 떠날 때, 가능한 쓰레기를 남겨두지 않으려 노력하겠다고. 유일하게 구입한 테이블과 의자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겠다고 한다. 매장 문 앞에 버려진 가구들을 고쳐 사용했다. 오래 사용해 헤어진 이불보를 커튼으로, 뜨개질로 모빌을, 이전 세입자가 두고 간 전등갓 등 인테리어 소품 하나하나에 사연이 다 있다.  

 

ⓒKwak Shin
ⓒKwak Shin
ⓒKwak Shin

 

전체 공간 구조도 이전 프랜차이즈 맥주집이던 시절 그대로다. 세워져 있던 벽, 내외부로 열리는 바테이블을 활용했다. 매장 운영 초기에는 외부에서도 바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창가에 바테이블석과 홀 테이블석, 안쪽 방 6인 단체석로 전체 20평 남짓 된다. 부엌은 오픈키친인데, 주방 설비가 무척 간소하다. 화구는 가정용 3구. ‘초보 사장’이라는 약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친구집에 놀러온 것 같은 풍경이랄까. 부엌 때문이 아니라 주방설비가 업소 규격으로 갖추지 못해 사실 가장 힘든 이는 부엌에서 일하는 제비일 것이다.

 

오픈 초기 바테이블 앞 창문이 활짝 열려 있다 ⓒpubblanc
오픈 초기 부엌, 화구 2개로 시작했다 ⓒpubblanc
ⓒKwak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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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없이 살 수 없어 No Cat No Life 

펍블랑에는 영업부장 역할을 대신하는 길고양이들이 있다.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일 때 “데크에 고양이 발자국을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다음날 실제로 데크에 새겨져 있던 발자국을 보고 어찌나 반가왔던지. 그간 여러 고양이들이 거쳐 갔는데, 현재 터줏대감은 몽이다. ‘크리스토퍼 몽블랑’이 그의 풀네임. 나이가 많아 동네 대장고양이이기도 하다. 치아가 좋지 않아 정성스레 약을 먹이고, 얼굴도 닦아 주고 챙겨줬더니 이제는 제 집처럼 펍블랑에 와서 먹고 쉬고 간다. 또다른 고양이는 ‘(한)여름이’. 태풍이 왔던 날, 물에 빠질 뻔한 녀석을 발견한 동네주민이 구조해 맡겼다. 입양처를 알아보다가 정이 들어 식구가 되었다. 고양이들은 매장 문 앞에서 손님들을 끌어 오고 손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매장 안팎에는 고양이 물건들이 눈에 띈다. 

 

ⓒKwak Shin

 

지금은 지금대로, 그때는 그때의 모습으로 

펍블랑을 시작한지 어느덧 7년. 제비 사장은 고민이다. 여길 떠나야 한다면, 다음 가게는? 인근 상권에 20~30대 고객이 늘면서 여러 기대감에 임대료도 함께 오르는 추세다. 여기를 떠난다면 이곳과 같은 모습은 재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펍블랑을 찾은 손님들이 ‘언니가 해주는 음식’ 처럼 편하게 먹고 즐겁고 신나게 떠들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기로 하고 오늘도 정성스럽게 손님을 맞는다.

 

ⓒKwak Shin
ⓒKwak Shin
ⓒKwak Shin

 

 


펍블랑 Pub Blanc 
서울 영등포구 양산로23길 6 1층
월~토 17:00-25:30 (일요일 휴무, 매월 첫째 주 월요일 휴무)
instagram @fffff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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