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동네에서 즐기는 고급 정찬

[Spot] ② 용산 파인다이닝 ‘레벨제로 Level:0’
에디터. 신채희 객원  사진. 최재원 Studio FLNT  자료. 레벨제로

 

운영자의 입장에서 조망하는 공간 이야기를 담는 새 연재 ‘스팟SPOT’을 시작합니다. 브랜딩과 공간감 모두 놓치지 않고 방문객을 새로운 경험으로 이끄는 장소가 그 대상입니다. 운영자를 인터뷰해 공간을 기획하고 구현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피고 그 속에서 나눌 수 있는 지혜를 전합니다.

 

용산역 인근 재개발을 앞둔 오래된 주택들이 모여있는 한강로 3가. 이곳은 나지막한 경관과 오래된 정취로 서울의 옛 모습을 좋아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동네이다. 비록 철거가 예정돼 있어 특유의 분위기를 즐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삼삼오오 모여든 창의적인 F&B 크리에이터들의 손길로 맛과 멋이 채워져 마지막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중이다. 각양각색의 개성 넘치는 곳들 중 요리와 예술, 그리고 공간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총체적인 경험으로 풀어내 호평을 받고 있는 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레벨제로의 외관. 출입문 너머 보이는 풍경이 지나가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Place_case

 

허름한 동네에서 즐기는 고급 정찬

낡은 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좁은 골목.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위치에 자리한 이곳은 파인다이닝, ‘레벨제로 Level:0’이다. ‘파인다이닝’이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고급 정찬을 선보이는 식당들은 강남 청담동이나 압구정동 같은 곳에 있을 법한데, 레벨제로는 어떤 연유로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되었을까.

 

“레벨제로는 색다른 경험에 초점을 맞춘 곳이에요. ‘다이닝 쇼룸’이라는 콘셉트로 분기마다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협업해 메뉴와 공간을 재구성하고, 손님들은 코스에 따라 장소를 이동하며 식사를 즐기죠. 차별화된 미식경험인 만큼 위치도 의외성을 가진 곳이길 바랐어요.” -데니 한 Denny Han, 레벨제로 수석셰프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레벨제로는 주방의 신기술을 연구하는 스타트업에서 시작한 실험실이자 갤러리 같은 레스토랑이다. 이들은 전과 다른 다이닝 문화를 선보일 특색 있는 장소를 찾던 중 이 지역을 발견했다. 구도심의 모습을 간직한 채 변화의 흐름에 앞서가는 동네 분위기와, 파인다이닝 분야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신들의 정체성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해 그 합合에 대한 확신을 갖고 2022년 5월 문을 열었다.

 

입구에서 바라본 실내정원의 풍경 ©flint
레벨제로를 이끌고 있는 데니 한. 호주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아티카와 뷔드몽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현재 이곳의 수석 요리사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창의적인 미식 경험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flint

 

시퀀스가 있는 동선, 이야기가 있는 공간

‘지상의 긴 공간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미식 경험.’ 레벨제로가 내 건 캐치프레이즈다. 굳이 공간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는 것은 고객 경험과 공간이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레벨제로는 단층 집들이 두 줄로 들어선 블록에 위치하는데, 유일하게 앞뒤 집이 연결되어 있는 길쭉한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반면에 긴 길이에 비해 폭이 매우 좁아 일정 규모의 조리 공간과 홀을 필요로 하는 식당으로 사용하기에는 비효율적이다. 인테리어를 총괄한 Soff의 김민호 대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이러한 특징을 부각시켜 ‘길’을 콘셉트로 한 시퀀스를 제안했다.

 

“좁고 긴 집을 처음 마주했을 때 골목 사이 또 다른 길처럼 보였어요. 그 느낌을 살리고자 정문으로 입장해 각 공간을 지나가면서 식사를 하고 후문으로 퇴장하는, 이동을 접목한 레이아웃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 김민호 Soff 대표

 

 

입구의 전실. 밖에서 미리 들여다본 실내정원으로 꺾어 들어가기 전 기대감을 높여주는 복도 역할을 한다. ©flint
(왼쪽) 정원에서 바라본 내부 전경. 다이닝룸과 바bar가 연결된 공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flint  (오른쪽) 레스토랑의 긴 공간을 표현한 겨울시즌의 디저트 ©Place_case

 

공간 기획과 경험 설계가 초반부터 함께 이뤄졌기에 ‘공간 이동’이라는 레벨제로의 핵심적인 운영 방식이 탄생할 수 있었다. 순서는 출입구부터 실내정원과 다이닝룸, 그리고 키친바까지 세 개의 공간이 후문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이 배치에 맞춰 이동하도록 했지만, 현재는 계절별 테마에 따라 공간 이용 순서에 변화를 주고 있다.

예를 들어, 겨울에는 실내정원이 맨 마지막 식사 장소가 돼 화로에 구운 마시멜로와 함께 캠핑 분위기로 코스를 마무리 한다면, 봄에는 첫 번째 장소가 돼 피크닉을 테마로 한 도시락을 먹는 식이다.

한 공간에서 장소를 이동하며 분절된 시간을 보내면 체감 공간이 더 넓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레벨제로는 이 점을 활용해 좁은 건물의 제약을 극복함과 동시에,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

 

겨울밤 실내정원의 모습. 기온이 떨어지는 하반기에는 폴딩도어를 닫고 다이닝 테이블을 실내에 배치한다. ©Place_case
라이브 키친으로 운영되는 바의 모습. 셰프들이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소통하는 공간이다. ©flint

 

식견을 넓히는 시간

레벨제로의 또 다른 특징은 패션브랜드처럼 계절별로 SS/FW 테마를 기획한다는 점이다. 각 테마는 요리뿐 아니라 음식과 작품, 그리고 공간에까지 적용된다. 마치 체험형 전시와 같은 경험에는 원예가부터 제품디자이너, 현대미술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함께 한다.

지난해 오픈 후 첫 겨울시즌에는 ‘Future Food’를 주제로 셀린 박 갤러리와 협업 전시를 진행했다. 디자이너들의 시선으로 상상한 미래의 식문화 관련 작품들과 그것에서 영감을 받은 레벨제로의 신메뉴를 선보였고, 미래 먹거리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밀웜으로 만든 비스킷을 제공하기도 했다. 

올 봄시즌에는 다섯 명의 작가들과 함께 ‘Vernal Sensory’라는 타이틀로 계절의 에너지를 공감각적으로 표현했다. 보물찾기를 하듯 정원 속에 숨겨진 핑거푸드를 찾아나서거나, 나만의 플레이트를 장식하기 위해 식물 채집을 진행하며 자연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먹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이잖아요.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비일상적이고 특별한 경험이 되기를 바라요.” – 데니 한

 

봄 시즌 정원에서 즐기는 요리들. (왼쪽부터) 김밥과 화전, 래디쉬가 담긴 피크닉 도시락, 핑거푸드와 직접 채집한 식물로 꾸미는 플레이트, 코와 입을 감싸 향을 극대화하는 컵에 담긴 매화꽃 콤부차 ©Place_case
디저트와 함께 나오는 비정형의 식도구. 평소와 다른 감각을 자극하도록 만들어진 전진현 작가의 작품이다. ©Place_case

 

음식과 함께 작품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 먹을 식食, 볼 견見이 더해져 식견識見이 넓어지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위해 레벨제로 팀은 수면 아래 백조의 발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이들은 주 4일만 영업을 하고 나머지는 R&D에 투자하는데, 스텝들은 로컬 푸드나 제철 식재료 관련 투어를 가기도 하고, 전시를 관람하거나, 다양한 레시피들을 실험하며 영감을 얻는다. 고객과 함께하는 시간의 퀄리티를 높이고자 탐구를 선행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창의적인 경험을 향한 진심이 엿보인다.

 

친환경의 가치를 담다

레벨제로의 예술 콘텐츠는 계절에 따라 테마를 달리하지만,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철학은 공간과 요리에 항상 담겨 있다. 기존 건물의 골조를 대부분 보존한 내부 공간부터 가구, 조명, 그리고 식기류까지 대부분의 하드웨어는 환경을 고려한 디자인이거나 자연보호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아이템이다. 평범하지 않은 테이블과 펜던트는 각각 친환경 소재인 폴리우레아와 재생지를 이용해 제작했고, 식기들도 계란껍질이나 플라스틱 팩 등을 녹여 만든 업사이클링 제품들을 사용한다.

이들은 전시식展示食을 만들 때에도 유기농 식자재와 제철 재료를 고집한다. 다만 단순히 좋은 식자재를 쓰기보다 의미 있는 소비에 중점을 두며 환경에 끼칠 영향을 고려한 결정을 내린다. 멸종을 초래하는 자연산보다는 친환경 양식 해산물을, 우리에서 배합사료로 사육된 소보다는 방목해 풀만 먹고 자란 소고기를 사용한다. 또한 버려지는 재료를 최소화하고자 남은 재료들은 말려서 가루로 만들거나 발효해 다른 요리의 소스 혹은 곁들임으로 재탄생시킨다.

 

재생지로 만든 최성일 작가의 펜던트와 스탠드. 바테이블에 놓인 소스와 청은 남은 식재료를 활용한 것으로, 칵테일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Place_case
겨울시즌 전채요리. (왼쪽부터) 업사이클링해 만든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전병, 계란껍질로 만든 트레이에 서빙되는 타르트, 분홍색 돌기가 있는 수저에 올려진 콤부차 젤리 ©Place_case

 

이들이 실천하는 친환경적 요리방식과 레스토랑의 이름 때문에 레벨제로의 콘셉트가 제로웨이스트 zero waste라는 오해를 종종 받기도 한다. 데니 한 셰프는 제로웨이스트는 레벨제로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이자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요리사로서의 당연한 책임이고, 스토리텔링의 요소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레벨제로는 다양한 감각과 사고의 자극을 선사하고자 노력해요. 어떤 손님에게는 친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그 역할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떤 영역이 되었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영감을 얻어간다면, 레벨제로가 추구하는 큰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 데니 한

 

 

다이닝룸에서 바라본 정원의 모습 ©Place_case

 

레벨제로의 예술적 콘텐츠를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 이면에 요리의 완성도에 대한 엄격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픈한지 1년만에 글로벌 레스토랑 지침서인 ‘미쉐린 가이드’에 선정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격식格式을 차린 부담스러운 식사가 아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예술적인 격식格食을 경험하는 곳. 감각의 저장고를 풍성하게 채워주는 시간을 누릴 수 있다.

 
 

레벨제로 Level:0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15길 31-20
수~토 18:00-22:00 (일-화 휴무)
instagram @l0_d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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