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다리는 편지가 있는 곳

[Spot] ④ 제주 편지 가게 ‘이립 ERIP’
ⓒChaehee Shin
글 & 사진. 신채희 객원에디터  자료. 이립

 

운영자의 입장에서 조망하는 공간 이야기를 담는 새 연재 ‘스팟SPOT’을 시작합니다. 브랜딩과 공간감 모두 놓치지 않고 방문객을 새로운 경험으로 이끄는 장소가 그 대상입니다. 운영자를 인터뷰해 공간을 기획하고 구현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피고 그 속에서 나눌 수 있는 지혜를 전합니다.

 

제주도 서쪽의 편지가게 이립(而立). 이곳에는 당신을 기다리는 편지 한 통이 있다.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받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조금은 비밀스러운 편지이다. 이 가게의 편지들은 봉투 겉면에 이름 석자 대신 이런 글귀들이 적혀 있다.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엄마가 보고 싶은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꾹꾹 눌러 적은 글자에서 이름 모를 이의 따뜻한 마음이 묻어난다.

 

가게 입구에서 바라보는 이립의 전경 ⓒChaehee Shin

 

제주 청수리의 외길을 달려 도착한 컨테이너 건물. 입구를 찾아 두리번 거리다 보면, 작은 팻말이 발걸음을 이층으로 이끈다. 계단을 올라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밖에서 보던 회색 건물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탁 트인 귤 밭 너머 산등성이가 보이고, 잔잔한 음악과 부드러운 인센스 향이 몸의 긴장을 살며시 풀어준다. 곧이어 따스한 목소리가 당신을 반긴다.

“무엇으로 준비해드릴까요?”
“레터 서비스 하나요.”

이립에는 음료와 다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레터 서비스 letter service’라는 독특한 메뉴가 있다. 익명의 누군가를 위해 편지를 작성하고 교환하는 이 메뉴에는 차와 디저트, 그리고 편지지와 연필이 따라온다. 원하는 자리에 앉은 뒤에 당신이 할 일은 천천히 차를 우리고 풍경을 즐기며 편지를 쓰는 일이다. 전자기기에 익숙한 손가락에 연필을 쥔 채 머릿속의 생각을 옮겨 적다 보면 무디어져 있던 마음의 감각들이 깨어난다.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며 편지지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다다를 무렵, 빼곡히 채워진 종이만큼 마음 한 켠도 차오르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아담한 다과상과 함께 제공되는 레터서비스 ⓒChaehee Shin
다녀간 이들의 편지를 비치해 둔 카운터 옆 공간. 김버금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스팟이기도 하다. ⓒChaehee Shin

 

“이립(而立)은 ‘스스로 뜻을 세우다’ 라는 의미죠.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차분한 분위기에서 편지를 쓰고 사색을 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나’를 더 알아가고 ‘나’로 바로 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어요. – 김버금 대표

 

레터 서비스의 마지막 단계에서 완성된 편지는 당신의 손을 떠난다. 봉투 겉면에 어떤 사람이 편지를 받기 원하는지 짧게 적어 사서함에 제출한 뒤, 편지장에 꽂혀 있는 다른 누군가의 편지를 고르면 된다. 칸칸이 놓인 봉투를 하나씩 살펴보다가 당신을 위해 쓰여진 편지를 발견하는 순간 설레임과 호기심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당신의 편지를 가져갈 사람도 이런 따뜻한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라게 된다.

 

다 쓴 편지를 놓아두는 편지장. 편지의 전문은 받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 ⓒChaehee Shin
편지장 너머 보이는 이립의 반대편 공간과 외관의 모습 ⓒChaehee Shin

 

‘익명의 편지를 통해 느린 대화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공간’. 김버금 대표는 어떻게 편지를 매개로한 가게를 만들게 되었을까? 현직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서울에 살던 당시 글쓰기 모임을 진행 했는데,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어하지만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막막해 하거나 자신의 글을 누군가 읽어주지 않으면 무용하다고 느끼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그녀는 훗날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된다면 그곳이 누구나 와서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곳이기를 바랬다.

2년 전 이립을 준비하며 사람들이 쉽게 글쓰기를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던 중 일기와 편지를 떠올렸다. 누구나 어렸을 적 한번은 써보았을 형태의 글들 중 특히 편지는 혼자 쓰지만,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있기에 글을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가게의 취지에 알맞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혹시라도 장난스러운 내용이나 혐오, 비방의 글이 있을 까봐 걱정했어요. 기대감으로 편지를 열어 보시는 분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제가 먼저 편지들을 읽어 보고 있죠.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런 편지를 두고 간 손님이 없었어요. 그때 알았어요. 이 먼 동네까지 찾아오는 분들은 진심을 남기고 간다는 것을요.” – 김버금 대표

 

이립에 앉아있는 김버금 대표 ⓒChaehee Shin
출입구 근처 편지장과 함께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이 있는 풍경 ⓒChaehee Shin
카운터 옆 통로를 지나면 조금 더 프라이빗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으로 연결된다. ⓒChaehee Shin

 

제주도의 주요 관광지에서 벗어난 이립의 위치상, 이곳은 지나가며 우연히 들르기보다 목적성을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조용한 동네는 잠시 일상을 벗어나 나를 돌아보고 사색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분위기를 제공한다. 김버금 대표는 2년 전 제주에서 한달살이를 하던 중 우연히 이 동네와 건물을 발견했다. 겉에서 보았을 땐 차가운 컨테이너 박스 같지만 2층에서의 풍경을 본 뒤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통창 너머로 펼쳐진 귤 밭과 마을의 일상풍경이 삶의 소소한 이야기로 채워질 그녀의 가게와 잘 어울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고도 공개적인 편지처럼, 이립의 공간은 홀로 또 함께 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약 18평 정도 되는 면적은 ‘ㄱ’자로 꺽여있어 어찌보면 비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김버금 대표는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 공간의 구분을 더 명확히 했다. 주출입구가 있는 영역은 카운터와 편지장, 그리고 커다란 테이블이 있어 개방적인 반면, 카운터 옆으로 꺾어 들어가면 창가의 1인 좌석들과 두 명이 마주보며 앉을 수 있는 평상이 있어 조금 더 프라이빗한 분위기이다. 두 영역 사이에는 천장이 낮아지는 게이트가 부드러운 전이공간의 역할을 한다.

 

건물의 외관. 2층 오른쪽 ‘ㄱ’자 구간에 이립이 위치한다. ⓒChaehee Shin
귤 밭이 바라보이는 안쪽 공간의 풍경 ⓒChaehee Shin

 

공간의 짜임새와 더불어 중요하게 여긴 부분은 편안한 분위기이다. 사색을 하며 이야기를 쓰는 공간이기에 사람들의 집중력이 분산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래서인지 이립은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아늑하다. 바닥에는 흐린 하늘빛의 카펫을 깔아 컨테이너 외관과는 다른 따뜻함을 부여했고, 손이 닿는 가구들은 주로 나무 소재를 사용했다. 외부 풍경과 시선이 중첩되는 내부 벽들은 인위적인 백색보다 햇살을 받은 듯한 따듯한 아이보리색 페인트를 얹었다. 무엇보다 어느 자리에 앉더라도 제주의 자연이 시선에 들어와 마음에 안식을 선사한다.

나지막한 귤 밭 사이 자리한 이 가게는 봉투마다 이야기가 가득 맺혀 사시사철 풍요로움이 넘친다. 내밀한사연들이 기록되고 나뉘는 장소라서 일까. 이립의 공기에는 생각과 마음의 켜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듯하다.

빛으로 배를 안내하는 등대지기처럼, 사색과 글의 공간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편지지기 김버금 대표는 이야기한다. ‘당신을 기다리는 편지’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어느 한 날, 당신도 이곳에서 느린 시간을 보내며 손끝으로 전해오는 삶의 온기를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다.

 

ⓒChaehee Shin

 


이립. 
제주 제주시 한경면 청수로 82-10 2층
목~화 11:30-18:00 (정기휴무: 매주 수요일)
Instagram @erip_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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