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만든 도시적 장치

[Archur의 낯선 여행] ⑧ 피렌체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
우피치 미술관에서 베키오 다리로 이어지는 바사리 통로 ⓒarchur
글 & 사진. 스페이스 도슨트 방승환

 

‘Archur’ 라는 필명으로 온·오프라인에서 도시와 공간을 안내하는 방승환 작가가 <브리크 brique> 독자들을 위해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도시지만 그 안에 낯선 장소,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낯선 작업들을 소개해 새로운 영감을 드리려 합니다. 
다양한 스케일의 장소와 공간에 대한 소개와, 현재에 이르게 된 이야기, 그리고 환경적 맥락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Archur와 함께 이색적인 세계 여행을 떠나보시죠.

 

도시는 권력을 드러내는 장소이지만 도시의 몇몇 공간은 대중을 피해 숨고 싶은 권력자들의 심리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이탈리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Alessandro de’Medici가 암살된 후 피렌체의 통치자가 된 코시모 1세 데 메디치Cosimo I de’Medici는 자신도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걱정은 피렌체 공작이 된 이후로 더 짙어졌다. 사실 코시모 1세를 불안에 빠뜨린 건 생전 본 적도 없는 알레산드로의 죽음이 아니라 암살을 자행한 사람이 알레산드로의 사촌이라는 사실이었다. 피렌체와 멀리 떨어진 무겔로Mugello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코시모 1세에게 알레산드로의 후계자 자리가 주어졌을 때 그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베키오 다리로 이어지는 바사리 통로 ⓒarchur

알레산드로의 폭정에 신물이 난 피렌체 시의원들은 귀족정보다 공화정을 채택하고자 했다. 그런 시의원들 앞에 나타난 코시모 1세의 모습은 얼떨결에 후계자가 된, 어떤 정치적 야망도 없는 시골 청년이었다. 심지어 코시모 1세는 통치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시의회에 넘겨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시의원들은 그의 행동과 공약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은 그를 허수아비로 내세워 실권을 장악하려는 흑심을 품었다.

하지만 이는 코시모 1세의 완벽한 연출이었다. 당시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피렌체에서 어떤 정치적 기반도 없던 18세 청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에 대한 적개심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권력을 손에 쥔 후 코시모 1세는 유약하고 무기력했던 첫인상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법을 바꾸고 유력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뒤 결국 독재자로 돌변했다. 공화정을 지지했던 세력들은 코시모 1세의 모습에서 알레산드로를 떠올리며 피렌체를 떠났다. 그리고 당시 피렌체와 대립각을 세웠던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켰다. 코시모 1세는 스페인 군대의 도움으로 그들과 맞섰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피렌체에서 그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코시모 1세는 ‘친親 황제-반反 프랑스’라는 정치적 노선을 확실히 하며, 자신을 배신할 수 있는 인사들을 하나둘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그 정점에 알레산드로를 암살함으로써 합법적인 계승자가 된 로렌치노 데 메디치가 있었다. 물론 로렌치노는 피렌체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코시모 1세에게 로렌치노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1547년 코시모 1세가 보낸 자객에 의해 로렌치노는 암살당했다.

로렌치노가 사라졌다고 해서 코시모 1세를 불안하게 만든 원인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불안은 더 커져 갔다. 공포가 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면 불안은 그 자체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로렌치노를 암살하고 나서 2년이 지난 1549년 코시모 1세는 자신의 거처를 아르노강 남쪽에 있는 피티 궁전Palazzo Pitti으로 옮겼다. 메디치 가문이 대대로 사용했던 메디치 궁전Palazzo Medici과 가문의 전용 예배당이었던 산 로렌초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 그리고 피렌체 대성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공시설이 아르노강 북쪽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코시모 1세의 결정은 파격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코시모 1세는 피렌체 대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누군가로부터 갑자기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바사리 통로가 시작되는 베키오 궁전과 아르노 강으로 이어지는 우피치 미술관 ⓒarchur

 

자신의 거처를 옮기는 건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장소를 옮기는 건 아무리 최고 권력자라 하더라도 쉽지 않다. 코시모 1세는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곳, 오랫동안 피렌체의 정치적 중심이었던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과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은 옮길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피렌체 시민들과 분리된 채 피티 궁전과 베키오 궁전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공간의 이름에는 의뢰자가 아닌 설계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이름이 붙어 있다. 피티 궁전에서 시작된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지나 우피치 미술관을 거쳐 베키오 궁전 남쪽으로 연결된다. 전체 길이는 대략 1 km 정도다. 기존 건물을 철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통로는 곧지 않고 구불구불하다. 심지어 베키오 다리 남동쪽에 있는 마넬리 탑Torre dei Mannelli에서는 탑을 소유하고 있던 마넬리 가문이 통로건설에 반대해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마델리 가문의 반대로 바사리 통로가 우회하게 된 마넬리 탑 ⓒarchur
바사리 통로가 건물 전면으로 지나가는 산타펠리치타 성당 ⓒarchur

 

바사리 통로가 지나가는 곳 중 가장 흥미로운 장소는 베키오 다리 남쪽에 있는 산타 펠리치타 성당Chiesa di Santa Felicita이다. 성당 전면으로 바사리 통로가 지나가는 데 그러다 보니 성당 파사드facade에 마치 기둥으로 받친 현관(Portico)이 설치돼 있는 것 같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정문 위에 돌출된 육중한 발코니가 보인다. 바사리 통로를 이용했던 코시모 1세는 발코니에서 예배를 보고 다시 통로로 빠져나갔다.

코시모 1세뿐만 아니라 바사리 통로를 이용했던 사람들은 군중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과 피렌체 시민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바사리 통로를 따라 만들어진 창이 모두 작은 이유다. 그런데 유일하게 큰 창이 있다. 바로 베키오 다리 가운데 광장 부분에 뚫린 세 개의 창이다. 이 세 개의 창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1939년 무솔리니의 명령으로 만들어졌다. 그해 피렌체를 공식 방문했던 히틀러에게 무솔리니는 아르노강의 전경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베키오 다리 가운데에 있는 큰 창까지 오기 위해서는 바사리 통로를 이용해야 했다. 무솔리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히틀러와 긴밀한 거래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거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 일본과 맺은 삼국 동맹 조약으로 구체화 됐다. 커다란 창은 바사리 통로를 만들고 이용했던 사람들과는 다른 무솔리니의 자신감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려는 히틀러 앞에서 무솔리니가 느꼈던 불안과 초조다.

 

대성당에서 바라본 피렌체 중심부 ⓒarc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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