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박종우 글 & 자료. 하우 건축사사무소 how architects
산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는 경사지 위에 100호 남짓의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모인 작은 마을. 마을 아래 큰 길 건너로는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가 바라보인다. 유취헌은 우면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 마을 안에 있다.
이곳은 부도심과 멀지 않으면서도 산에 가로막힌 지리적 상황과 불편한 대중교통 탓에 인근에서 흔치 않은 저밀도 단독주택지로 남아 있는데, 그로 인한 고유의 분위기와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이 마을에도 근래 몇몇 오래된 단독주택이 전형적인 다가구주택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여기서 한 세대 이상 살아온 사람들로, 프로젝트 초기에 만난 몇몇 주민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우려와 아쉬움을 토로했다.
설계의 시작은 경사지를 활용해 지하 주차장과 임대세대 등 건축주가 필요로 하는 내부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면서도, 마을이 가진 스케일과 골목길의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우선 지하 주차장의 외벽과 임대세대의 담장을 하나의 요소로 연결해 기단부를 구성했다. 기단부의 높이는 가능한 낮게 하면서 여러 번 분절하고 개구부를 만들어, 행인이 느끼는 위압감을 줄이고 골목과 집이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상부의 매스는 대지 동측의 전면도로에서 최대한 뒤로 물러나도록 했고, 두 부분으로 분절해 길에서 느껴지는 집의 볼륨을 줄였다. 도로와 집 사이에는 주인세대와 임대세대에서 각각 연결되는 두 개의 마당을 배치하였는데, 임대세대의 마당은 담장에 개구부를 내어 맞은편 집의 잘 가꿔진 소나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외부마감 재료는 마을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연회색 치장벽돌과 송판 노출콘크리트를 사용했다. 남향의 창과 마당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집이 북측도로 쪽에 붙어 세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는데, 북측 입면에는 따뜻한 느낌의 목재 마감을 사용해 골목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실내는 각각의 공간을 독립적으로 계획하면서도 사이사이 외부공간을 배치해 이를 통해 이어지도록 했다. 1층의 거실과 식당은 현관을 중심으로 나뉘지만 마당을 통해 서로 인지할 수 있다. 2층 가족실과 아이방은 테라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도록 해 보다 직접적으로 시선을 연결했다. 또한 현관이나 욕실 같은 공간에도 조망과 채광을 위한 작은 창들을 계획해 실내공간이 지나치게 개방적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외부의 자연을 느낄 수 있다.
방의 문은 넓게 열리는 미닫이문으로 열어두고 쓸 수 있게 하여, 필요에 따라 개인 공간이 가족실이나 복도와 같은 공용공간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했다.
밤이면 별이 보이고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산 중턱에 위치한 이 집은 건축주의 증조부가 사시던 집을 본 따 유취헌幽趣軒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는 그윽한 멋과 풍취가 있는 집이라는 뜻을 담았다. 가족들이 이 공간에서 멋과 풍취가 가득한 일상을 누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