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기억을 간직하다

도시의 시간을 쌓아 올린 '연암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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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박경섭  사진. 최진보  자료. 에이라운드 건축 a round architects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연암빌딩은 낯익되 미묘하게 생소한 생김새의 건물이다. 친숙한 재료인 붉은 벽돌을 핵심 외장 재료로 사용하였지만, 익숙한 방식으로 쓰지는 않았다. 건물에 평범한 재료를 사용한다고 하여, 그 결과물이 흔하디흔한 공간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연암빌딩은 기본적인 재료와 공간의 기초적인 속성에서 흔치 않은 쓰임새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점을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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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기억하는 것
서울은 좀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 도시이다. 도심의 건물은 대체로 곧 사라져야 할 것으로 취급받으며 일찍 나이 들어 버리거나, 트렌드에만 맞춰 지어진 까닭에 좀처럼 나이 들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다수이다. 도시에서 공간은 쉽사리 없어지고, 그만큼 쉬이 생겨난다. 오래된 동네와 건물을 빨리 치워버려야 할 미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도시와 공간에 다층적인 기억이 쌓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공간의 기억에 관한 고민을 담은 건물과 만나는 일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연암빌딩이 바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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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면도 ⓒa round architects

 

마포구청역 5번 출구를 나와 처음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연암빌딩이 있다. 연암빌딩 주위에는 고만고만하게 낮은 건물만이 있어 유독 그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빌딩 바로 옆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단독주택이 있다. 본래 대지에는 바로 옆 2층 단독주택과 똑같이 생긴 건물이 있었다. 일종의 쌍둥이 건물이다. 과거에는 한 시공사가 같은 동네에 여러 건물을 지으면서, 비슷한 모양새의 건물이 모여있는 경우가 흔했다. 에이라운드 건축은 오랜 시간 골목 초입에 함께 자리해 온 쌍둥이 건물에 관한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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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빌딩 대지에는 1960년대~1970년대 유행한 유럽식 주택 유형의 집이 있었어요. 옆 건물과 서로 쌍둥이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었죠. 반지하, 입구와 계단, 그리고 기와지붕까지 생김새가 똑같더라고요. 공간에 중첩된 기억과 연계를 잇고 싶었어요. 건축은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잖아요. 주민들이 기억하고 있을 이미지를 찾는데, 붉은 벽돌과 목련 나무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특히 건물 앞 목련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조경을 통해 건물 입면에 녹음의 이미지를 투영해 봤어요. 스타일으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땅에 구축된 언어를 찾아내는 작업으로서의 건축을 지향하는 에이라운드와 결이 잘 맞는 프로젝트였죠.”  – 박창현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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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면도 ⓒa round architects

 

재료가 말하는 것
설계 과정에서 붉은 벽돌과 녹음은 현재와 과거를 잇는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에이라운드는 두 요소를 단순히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과 공간감을 만드는 장치로써 활용했다. 먼저 벽돌을 층에 따라 조금씩 달리 쌓음으로써, 입면은 적당한 익숙함과 낯섦을 모두 갖게 되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벽돌을 쌓아 올린 층과 벽돌을 반으로 쪼개어 갈라진 면이 정면으로 오도록 한 층이 대비되는 식으로 고유의 질감과 형태를 갖춘 것이다. 여기에 건물 입면에 화단을 배치함으로써, 목련 나무에 관한 추억을 간직한 이들이 계절별로 느꼈을 푸르름이 이어지는 한편 재해석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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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빌딩은 플랫한 면으로서 입면이 아니라, 깊이감과 움직임을 통해 발생하는 다채로운 얼굴을 가진 입면을 통해 대지에 새로운 언어와 기억을 남긴다. 입면의 굴곡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는 재료의 속살을 다각도에서 조망하도록 한다. 또한 건물 측면에 붉은 벽돌과 대비되는 검은색 테라코타가 배치됨으로써, 붉은 벽돌의 존재감이 한층 깊이 각인된다. 재료의 속성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입면과 재료 간 대비로 인한 강조를 활용한 건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유리와 철로 만들어진 매끈한 형태의 마천루와는 전혀 다른 공간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에이라운드의 건축에서 재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지향점이다. 사람과 공간에 관한 고민을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에이라운드 건축 박창현 대표 ©BRIQUE Magazine

 

“시공 과정에서 비싼 재료를 쓰는 것보다, 흔히 쓰이는 재료를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사용하는 방식을 선호해요. 요즘은 재료 고유의 질감을 활용하는 것보다 매끄러운 표면을 구현하는 걸 좋아하죠. 그러다 보니 도시의 모습이 천편일률적이에요. 기억과 이야기가 사라진, 삭막한 공간만이 남는 거죠. 재료와 공간을 비롯한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에요. 최소한의 재료에서 최대한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물성에 담긴 가치를 포착해 공간과 접목하는 게 중요하죠. 연암빌딩에서는 벽돌을 쌓을 때 생기는 줄눈의 간격이나 수평성을 강조한다거나, 줄눈에 색을 넣어 일체감이나 양감을 주는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늘 현장에서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한 여지를 두고 작업하는 편이에요. 건축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어떤 부분을 비워두고 시작할지를 정하는 일인 것 같아요.”  – 박창현 건축가

 

0 to 1 내부 공간 ©BRIQUE Magazine
0 to 1 내부 공간 ©BRIQUE Magazine
1층 평면도 ⓒa round architects

 

공간을 채우는 것
3층은 건축주가 운영하는 출판사 사무실로, 4층과 5층은 건축주 가족의 주거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2층은 에이라운드 건축 사무실이며, 1층에는 공용공간이자 팝업 대여 공간인  0 to 1(제로 투 원)이 있다. 에이라운드 건축은 연암빌딩의 내부 공간을 빛과 어둠을 통해 풀어냈다. 1층 0 to 1은 이전에 있던 건물의 반지하에서 착안한 공간이다. 0 to 1은 양쪽 벽면에 창이 없는 대신 전면과 후면을 통창으로 만들었다. 불이 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 공간은 전면과 후면에서 들어오는 빛을 통해 파악되는데, 이 과정에서 0 to 1의 깊이감은 실제보다 더 깊게 인식된다. 이용자가 받는 긴장감은 내부 조명으로 완화되는데, 이 간극이 좁혀지는 과정에서 이용자는 자연스레 편안함을 느낀다.

 

2층에서 내려다 본 출입문 ©BRIQUE Magazine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 ©BRIQUE Magazine
2층 평면도 ⓒa round architects
3층 평면도 ⓒa round architects

 

이러한 방식은 내부 공간인 계단과 복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대문 전면과 계단 창틀 중간중간 목재 루버가 쓰였는데, 이를 통해 외부의 빛과 시야는 선택적으로 내부 공간으로 들어온다. 대문과 마주한 이는 가장 먼저 목재 루버 사이로 보이는 어둠과 마주한다. 문 안으로 들어오면 어둡고 차가운 공기를 따라 널찍한 계단이 펼쳐진다. 이용자는 자연스레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계단 끝으로 들어차는 빛을 보며 서둘러 계단을 오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이 층마다 반복된다. 공간이  심리적 요인에 따라 압축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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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서 빛은 공간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죠. 우리가 사는 도시는 어둠이 사라지고 오로지 밝음만 남아 있어요. 그런데 밝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연암빌딩 내부 공간에서 빛과 어둠을 조절한 까닭은 바로 그 지점 때문이었어요. 어슴푸레한 빛으로 꽉 찬 공간을 지나갈 때면, 유달리 공간이 밀도 있게 느껴지기 마련이죠. 어두운 공간을 빨리 지나가고 싶은 심리가 공간의 거리감을 짧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요. 특히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갈 때 하늘이 보이는데, 전혀 다른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들게 하죠. 빛과 어둠의 정도를 조정하는데, 목재 루버를 활용해 봤어요. 빛이 루버로 된 목재 사이를 통과하여 잘게 분할되어 내부로 들어오는데, 세밀하게 나뉜 빛의 질감이 연암빌딩 내부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 박창현 건축가

 

연암빌딩 2층 ©BRIQUE Magazine
연암빌딩 2층 ©BRIQUE Magazine


건축이 지향해야 할 것
건축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동시에 건축은 지역을 조성하는 일이며, 도시를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좋은 건축은 대지의 입지, 재료의 가격, 임대료의 상한선에 따라 정해지지 않는다. 건축은 건축주의 의뢰에서 시작되고, 설계자의 계획에 따라 형태를 갖춰나가지만, 쓰임새와 가치를 찾는 일은 거주자와 이용자의 몫이다. 사는 이와 쓰는 이에게 있어 어떤 공간이 될 수 있느냐는 좋은 건축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일 것이다.
연암빌딩은 수십 년의 기억을 잇는 곳이자, 건축 본연의 가치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는 곳이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느낌으로 건축의 모양새 너머 쓰임새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의미 있는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연암빌딩 3층 ©BRIQUE Magazine
연암빌딩 3층 ©BRIQUE Magazine

 

“건축은 많은 이와 함께 작업하는 일이에요. 에이라운드는 건축의 과정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 프로젝트 스텝과 건축주, 시공사가 비슷한 비율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유의해요. 어려운 일이죠. 생각해보니 건축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네요. 오히려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분명한 건 다양한 제약과 모순 속에서 상상력이 꽃핀다는 거예요. 해결책은 언제나 찾을 수 있어요.”  – 박창현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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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빌딩’ 전체 스토리 담은 <브리크brique> 종이잡지 vol.4

*책 자세히 보기           https://brique.co/book/brique-vo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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