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닌

[story] 다섯 지붕 아래 아홉 가족
ⓒBRIQUE Magazine
에디터. 윤정훈  사진. 윤현기  자료. 스튜디오인로코건축사사무소

 

① 함께, 이곳에 살아가는 이유 — ‘월락동 여러집’ 공간 이야기
② [Interview]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닌 — 다섯 지붕 아래 아홉 가족
③ [Architects]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건축 — 스튜디오인로코건축사사무소 


땅이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겨울의 끝자락, 전답으로 둘러싸인 월락동 여러집을 찾았다. “멀리서 오셨습니다.” 어디선가 막 밭일을 하고 온 듯한 편안한 복장의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막연하게 생각한 병원장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는 기자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그는 김진영 건축주였다. 집 주변 곳곳 그가 직접 심은 나무가 눈에 띄었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마른 가지에 잎이 돋듯, 찬바람이 잦아들면 여러집 마당에 옹기종기 모일 이웃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다음은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게 만드는 모두의 집에서 김진영, 유지선 부부와 나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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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지역에서 보기 드문 형태의 집인 것 같아요. 남원엔 언제부터 살았나요?

김진영 2000년부터 살았어요.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병원에서 연구강사를 하다 해외 연수 준비를 하기 위해서 잠시 이곳으로 내려왔죠. 서울에서는 연수 비용은커녕 내 집 하나 구하기도 어려웠거든요. 당시 남원에 월급과 함께 관사를 제공하는 병원이 있어서 잠깐 머물다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꼭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서울에서의 삶은 어땠는데요?

김진영ᅠ집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어요. 월세를 아끼기 위해 가파른 골목이 있는 달동네에 살았고, 과천 같은 외곽 지역에서는 대로변의 차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죠. 남원에 내려와 관사 생활을 하면서 걱정이 많이 줄었어요.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월세에 따른 지출을 줄이는 것만으로 생활이 많이 안정됐습니다.

 

대도시에서의 빠듯한 삶보다는 지방에서 누리는 안정된 삶을 택하게 된 거군요. 젊은 시절의 경험이 이 집을 있게 한 셈이네요.

김진영ᅠ젊은 시절에 겪은 어려움을 토대로 나중에 내 병원을 지으면 직원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 주는 원장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원은 인구소멸위험지역이에요. 이런 지역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큰 도시로 가야 한다고 말하죠. 솔직히 이곳에서는 공무원 되는 것 말고는 먹고살 길이 마땅치 않거든요. 자영업을 해봤자 서울보다 장사가 잘 안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요.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병원에서도 훌륭한 인재를 유치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어요. 간호사나 물리치료사 등 병원 운영을 위한 필수 인력이 모두 큰 도시의 대형 병원으로 집중되니까요. 계속 이러다가는 병원에서 제공하는 치료의 질이 낮아질 수 있다고도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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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의 주거 복지를 위해서라면 병원 근처의 건물을 임대하는 손쉬운 방법도 있는데요. 사택을 짓기 위해 건축가에게 설계까지 의뢰한 점이 의아했어요.

김진영ᅠ서울에는 하우스 푸어house poor가 많잖아요. 많은 사람이 버는 돈의 상당 부분을 월세와 대출 이자로 내며 살고 있죠. 능력있고 성실한 보건 의료인들이 지역에서 좀 더 안정적이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숙련된 건축가가 지은 아름답고 튼튼한 건물에서 좋은 환경을 누리며 고향을 지키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저축도 하게끔요. 병원장으로서는 좋은 의료진과 함께 진료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죠.

 

스튜디오인로코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김진영ᅠ집을 짓기로 하고 건축가를 알아보던 중 아내가 지인에게 추천을 받았어요. 강승현 소장과 김나운 소장을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의 눈빛이 제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병원에서 주니어 스태프로 근무하던 30대 후반의 제 자신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두 소장의 주택 설계 경험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믿음이 갔어요. 의사로서 경험이 많이 없던 시절, 수술을 앞두고 정말 많은 준비를 했거든요. 오히려 제 집을 더 꼼꼼히 설계해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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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기 전, 이 땅에서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었다고요. 건물 부지로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진영ᅠ집 주변으로 가까운 거리에 유치원과초·중·고등학교가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어요. 도보로 안전하게 통학할 수 있어 자녀가 있는 직원들이 마음 놓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죠. 인근에 대형마트와 번화가가 있어 편리하고, 지리산의 능선을 조망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좋은 입지 조건을 극대화하기 위해 건축가와의 상의 끝에 집을 어긋나게 배치했어요. 아파트처럼 여러 동을 일렬로 나열하면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 전부 창을 낼 수 없으니까요. 덕분에 모든 세대가 사방에서 들어오는 빛과 바람을 충분히 누리고, 주변 풍광을 바라보며 지리산의 좋은 기운을 온몸으로 받을 수 있게 됐죠. 지리산 품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이좋게 지내며 긴 세월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집을 요청했습니다. 동시에 겉모습은 너무 튀지 않게, 사생활이 잘 지켜지는 집을 의뢰했죠.

 

본인 집과 직원 숙소를 한 부지에 지은 이유가 궁금해요. 비용부터 사생활까지, 여러모로 부담이 만만찮았을텐데요.

김진영ᅠ말마따나, 초반엔 제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상당히 무모한 결정이죠. 20년간의사 생활을 하면서 번 돈의 대부분과 앞으로 상당 기간 병원에서 나오는 수익을 합해야 하는 돈을 투자해, 수도권도 지방 대도시도 아닌 인구소멸지역에 집을 짓는 일이었으니까요. 집 대신 종합병원을 차리면 훨씬 풍족하게 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미련한 일을 하냐는 말까지 들었어요. 하지만 제가 병원을 설립해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는 데는 제 노력도 있지만 병원을 믿고 와준 주민들, 그리고 함께 고생한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이제껏 이룬 성과를 직원들과 나누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지선ᅠ집을 짓기로 한 초반부터 직원들과 함께 살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직원 집은 따로 지어 주고 원장 가족은 다른 데 살면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것 같잖아요. 같은 재료로 만든 같은 모양의 집에 살면 하나의 공동체 같을 테니까요. 걱정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이웃 간 불화가 생기면 어떡하나, 집이 직장처럼 느껴지면 어떡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1년 동안 살아본 바, 그러한 걱정은 기우였어요. 우려했던 것보다 조용하고, 분리배출 등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소한 규칙도 잘 지켜지고 있어요. 잔디깔기나 눈 치우기도 서로 조금씩 도와가며 하니 금방 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게 사람 사는 맛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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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집 짓기라 크고 작은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그만큼 짓고 나서의 감회도 남다를 것 같고요.

유지선ᅠ몇몇 공간은 설계 도면에서 볼 때와 실제 간 차이가 있더군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공간이었는데 막상 짓고 나니 잘 사용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설계부터 준공까지 3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집이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나 불안하기도 하고, 공사로 인해 매달 지출하는 돈도 큰 스트레스였죠. 하지만 집을 짓고 난 지금은, ‘좀 더 일찍 지을걸’ 하는 생각을 해요. 내가 사는 공간을 아끼게 되고 안정감이 들면서 ‘내가 이런 좋은 공간을 누릴 자격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자존감도 높아졌어요.

 

설계 혹은 공사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유지선 2020년에 남원에 비가 무척 많이 왔어요. 이 집은 당시 공사 중이었는데 창문 설치 전이어서 실내 목재 공간에 곰팡이가 생겨버렸죠. 인테리어 기술자가 방문해 보수를 진행했는데, 새로 보수하는 부분과 기존 부분의 색이 다르더라고요. 1년 사이에 나무의 색이 바뀐 거죠. 이를 두고 기술자는 나무가 익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이 유독 마음에 크게 남았어요. 나무가 익으면 집도 익어가는 셈이니까요. 앞으로의 시간이 더 기대되는 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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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 살기 전엔 아파트에 살았다고요.어떤 변화를 체감하는지도 궁금해요.

유지선ᅠ건축가에게 집을 통해 공간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줄곧 아파트에 살아왔기에 다양한 공간을 누리는 즐거움을 몰랐거든요. 일반적인 아파트는 공간이 평면적이잖아요. 그에 비해 이 집은 위아래로 움직일 일이 많아서 무척 새로워요. 공간을 여행하는 느낌이랄까요. 2층으로 구성하지 않고 넓은 1층 집을 구성했다면 이만큼 재밌진 않았을 거예요. 지금껏 살면서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만족해요. 집에서의 시간이 좋아 집을 잘 안 나가게 된다는 단점이 있네요. (웃음) 딸과도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요, 딸이 느낀 가장 큰 변화는 자연과 가까워졌다는 거였어요. 천창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집 앞의 논에서 맹꽁이가 우는 소리, 여름날의 논에서만 볼 수 있는 초록 물결 등 아파트에 살 때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죠.

 

원장님 가족을 비롯해 총 아홉 가구가 함께 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하나의 작은 마을 같네요. 함께 살다 보면 그에 따른 불편함이 당연히 있겠지만 같이 할 수 있는 재밌는 일도 많을 것 같아요.

김진영ᅠ집 앞에 있는 닭장 보셨나요? 직원들과 함께 관리하는 거예요. 아홉 가구가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가며 분리수거를 하는데, 분리수거를 맡은 세대에서 그 주에 닭들이 낳는 알을 가져가고 있어요. 집주인인 저도 두 달에 한 번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웃음)
유지선ᅠ남편이 워낙 부지런해서 집 주변 텃밭을열심히 가꾸는데, 감자나 고구마 등 수확하기 쉬운 농산물은 함께 캐내 나눠 가져요. 원래는 함께 모여 반상회를 하거나 식사를 하는 것도
생각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어요.

 

월락동 여러집은 두 분에게 어떤 의미이며, 직원 또는 지역 사회에 어떤 집으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김진영ᅠ월락동 여러집은 저의 청춘과 중년 시절의 노력이 총체된 공간으로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크지요. 그렇지만 단순히 개인의 성취 또는 희생만으로는 기억되길 바라지 않아요. 이 집이 대도시 집중 현상과 자본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작은 모범 답안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개인적인 바람을 덧붙이자면, 소도시에서의 안정적이고 쾌적한 삶에 더 많은 간호사, 물리치료사분들이 관심 갖고 저희 병원에 와주기를 기대합니다.
유지선ᅠ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데, 저는 이름을 남길 위인은 못 돼서 건축물을 남긴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웃음) 여러집이 남원 지역에 들어설 아름다운 건축물의 시작이 됐으면 해요. 이곳에서 직원들이 안정감과 자존감을 높이고 아름다운 공간을 누리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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