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질서를 재편하는 법

[Interviewy] 사소하지만 작지 않은 변화
©BRIQUE Magazine
에디터. 윤정훈  사진. 노경, 윤현기  자료. 소수건축사사무소

 

① 집, 도시의 여백이 되다 — ‘티루프’ 공간 이야기
② [Interview] 일상의 질서를 재편하는 법 — 사소하지만 작지 않은 변화

③ [Architects] 다수를 위한 소수의 건축 — 고석홍, 김미희 소수축사사무소 소장


 

잔잔한 라디오 소리 가운데 시시각각 변하는 빛 그림자가 맞은편 인터뷰이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집을 지은 후 맞은 소소한 변화를 하나둘씩 꺼내놓는 구만회, 최영숙 부부는 새 공간에서의 삶에 완전히 안착한 듯했다. 낡은 2층짜리 구옥에서 살던 가족은 집을 통해 일상의 질서를 재편하기로 했다. 쾌적함, 편의성, 단열 등 집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제외하고 가장 필요한 건 각자의 공간이었다. 기존의 생활 공간은 세를 준 1층을 제외하고 남은 2층뿐이었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과 모든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저 구획된 곳이 있을 뿐 사실상 분리된 공간은 없었던 것이다. 저만의 방식대로 집에 있기를 즐기는 가족을 위해 개별 공간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거실, 주방과 같이 고정돼야만 할 것 같은 곳은 과감히 위치를 이동시켰다. 항상 TV가 틀어져 있던 거실은 아늑한 다락으로, 구석에 있던 주방은 가장 넓고 환한 자리로 나아갔다. 이제 가족이 모이는 곳은 주방이며, 거실은 이따금 올라가는 곳이다. 살던 자리는 그대로지만 가족의 시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흐르는 중이다. 

 

구만회, 최영숙 건축주 가족 ©BRIQUE Magazine

 

주방 큰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정말 근사해요.
최영숙ᅠ아침에 일어나서 나오면 구름부터 보여요.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죠. 밤엔 길에 걸린 줄 조명에 불이 들어오는데 그것도 하나의 볼거리예요. 참, 우리집이 노을 맛집이더라고요. 특히 4~5월이 정말 예쁘죠. 이사 온 지 반년쯤 됐는데 노을 사진 찍은 것만 100장은 될 거예요.(웃음)

 

성내동에서 무척 오랫동안 살아왔다고 들었어요. 예전 집도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고요.
구만회 성내동은 제가 태어난 동네예요. 옛집에서 이 집으로, 살면서 딱 한 번 이사를 한 셈이네요. 예전에 살던 곳은 한 번의 리모델링을 거쳤을 뿐이라 무척 노후했어요.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죠. 그러다 집을 팔고 아파트로 갈지, 새로 지을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왔어요. 정든 동네이고, 강동역 바로 앞이라 가족과의 상의 끝에 신축을 결정했죠. 제가 재밌는 거 하나 보여드릴까요? 둘째 딸이 저한테 메일로 보낸 PPT 자료인데요. 집 짓기 전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거예요.

 

같은 집에 사는데 메일을 받았어요? (웃음) 바라는 집의 형태부터 가족 간 소통 방식까지 보기 좋게 정리했네요. ‘오래 살 집 공들여서!’ 눈에 띄는 대목이에요. 의기투합했을 가족의 모습이 그려져요.
구만회 건축가 섭외부터 임대 관련 시장 조사까지 딸들이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의견을 냈어요. 집 짓는 과정에서 식구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죠. 임대를 통해 과연 건축비가 확보될까, 걱정이 앞섰거든요. 그런데 딸들이 인근 공인중개사무소 스무 군데 정도를 들러 관련 정보를 파악해줬어요. 어느 정도 현실성 있는 정보를 들으니 안심이 됐죠.

 

소수건축에는 어떤 계기로 설계를 의뢰했나요?
구만회ᅠ처음엔 이 동네에 있는 회사로 알아보고 설계안도 몇 개 받아봤어요. 그런데 건축비는 저렴해도 근방에서 볼 수 있는 집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죠. 그럴 바엔 굳이 신축할 필요가 없잖아요. 한 번 짓는 거 제대로, 집다운 집을 짓고 싶어 서울에 있는 건축 사무소를 부단히 알아봤어요. 그중 두세 군데를 방문했는데 어떤 곳은 지나치게 긍정적이고 어떤 곳은 설계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더라고요. 가장 현실적이고도 적극적인 이야기를 해준 곳이 소수건축이었어요.

 

어떤 집을 요청했나요?
최영숙ᅠ현관문을 열면 집안의 모든 방이 다 보였는데, 조금이라도 정리가 안 돼 있으면 심란하기 그지없었어요. 그렇다고 방문을 닫고 있자니 답답해 가족 간 사생활 보장이 어려웠죠. 특히 딸들이 불편했을 거예요. 그래서 각자의 공간이 보호되는 집을 요청했어요. 4층에 내려가면 첫째와 둘째의 방이 서로 틀어져 있어요. 그 안에서 뭐 하는지 바로 보이지 않도록 방향을 조정한 거예요.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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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가족이어도 각자의 사생활과 공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건 정말 맞는 말이에요. 전 아직 독립을 못 했는데, 부모님과 다른 층에 산다는 게 자식 입장에서 정말 부럽네요. (웃음)
구만회ᅠ공간은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잖아요. 가족 간에도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로 붙어 있을 때 생기는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요. 결과적으로 집이 한 층에서 세 층으로 나뉘게 됐으니 훨씬 좋아진 셈이죠. 오르내리느라 몸은 고단하지만요. (웃음)
최영숙ᅠ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많아져 충분히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공간은 분리됐지만 같이 있는 시간이 줄진 않았어요. 특히 5층 공간이 좋아 아이들이 자주 올라오곤 하죠. 제 옆 침대에 누워 있기도 하고, 주방 평상에 앉아 밖을 보거나 노트북을 하곤 해요. 예전엔 거실에 TV가 계속 틀어져 있어서 대화가 많지 않았어요. 지금은 주방에 TV 대신 라디오만 두었는데, 그러니까 이야기를 훨씬 많이 나누게 돼요. 예전 식탁은 정말 밥만 먹는 곳이었다면 지금의 식탁은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이 잘 돼서 좋아요. 창가에 평상을 두니 부부 둘만의 공간도 생겼어요. 원래는 이렇게 자주 붙어 있지 않았거든요. (웃음) 식사하고 나서 같이 차 한잔 마시며 바깥을 구경하는 게 일상이에요.

 

이 집에선 주방이 곧 거실인 셈이네요.
최영숙ᅠ주방을 넓히고 다락을 거실처럼 꾸몄는데 생각보다 자주 올라가진 않아요. 어울리는 테이블과 가구를 더 놓아야 하는데 지쳐서 멈춘 상태예요. (웃음) 그래도 아마 올해 마지막 날엔 거실 다락에 모여 있을 것 같아요.

 

12월 31일에요?
최영숙ᅠ저희가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퍼즐을 맞추거든요. 연례 가족 행사인 셈이죠.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했던 건데, 남편이 바빠서 연말에 어딜 가진 못하고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당시 아이들에게 뭔가 기억에 남는 일을 만들어 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500피스에서 시작해 1000피스까지 왔죠. 올해는 그 일을 다락에서 하기로 했어요.

 

집을 짓고 나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최영숙ᅠ원래 집 앞 골목 가로등의 조도가 낮아 밤엔 어두웠어요. 그러다 이 일대가 강풀거리로 명소화되면서 줄 조명이 달렸는데 그마저도 밤 10시면 소등되죠. 그런데 집을 새로 짓고 나서 골목이 한결 환해졌어요. 건물 자체도 밝고, 1층엔 사람이 지나가면 자동으로 조명이 켜지거든요. 사실 처음엔 전기세가 아깝다는 생각도 했는데 사람들이 전보다 환한 길을 다니는 걸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요.
구만회ᅠ올해 3월 말쯤 둘째가 유럽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날이었어요. 딸은 아내가 해준 김치볶음밥 한 그릇이랑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는 바깥을 보다가 이내 잠들었죠. 그런데 그 표정이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어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죠. 집이라는 건 결국 이런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예비 건축주를 위한 조언을 부탁드려요.
구만회 ‘조화석습朝花夕拾’이라는 말이 있어요. 아침에 떨어진 꽃을 저녁에 줍는다는 뜻으로, 어떤 상황에 즉각 대응하지 않고 여유롭게 기다린 다음 매듭짓는 게 현명하다는 의미예요. 집을 준비할 때 조급해선 좋을 게 없어요. 이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죠. 설령 하자가 생겨도 고치면 돼요. 집이 있는 곳이 번화가가 아니라서 임대가 잘 될지도 걱정이었는데, 신중하게 뜻 맞는 세입자를 기다렸어요. 준공하고 한두 달 지나 조경이 더해지며 완성도를 갖춰가니 관심 있는 사람들이 으레 공인중개사무소를 통해 연락을 주더라고요. 조금 물러나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비로소 좋은 집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Kyung 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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