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코끼리잠

에디터. 장은영 글 & 자료. 푸하하하 건축사사무소 FHHH friends

오래된 마을에 새로 지은 건물은 낮은 건물들 사이 홀로 불쑥 튀어나와 평온한 분위기를 깨버리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잘 지은 건물이라도, 낮고 평평한 땅 위에 불쑥 튀어나와 있으면 ‘저것만 없으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덩어리의 등장은 마을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변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반가움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그래서 오래된 마을에 새로운 건물을 설계할 때는 주변 환경에 따를지 아니면 놀라움과 새로움을 보여줄지를 먼저 고민한다.

제주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지만 그 속도를 늦추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건축주가 게스트하우스를 지을 곳으로 이곳을 택한 것도 아직 조용하고 느린 이 동네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결국 우리는 포근하고 아담한 동네 풍경에 따르기로 했다.

애월읍의 오래된 마을은 대지가 도로보다 낮다. 이 경우 빗물과 하수를 처리하기 어렵고 외부인의 시선을 피해 창문을 설치하기도 어렵다. 반면 낮은 땅만의 좋은 점은 기술적인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포근함이다. 설계에 들어가기 전 낮은 땅과 높은 땅의 집에서 각각 머물러보았는데 높은 땅에서는 속이 뚫리는 개방감을 느낄 수 있었고, 낮은 땅에서는 푹 꺼진 소파에 누웠을 때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낮은 땅을 돋아 높게 만들지 않고 주변 건물들과 어울리는 낮은 높이로 계획했다. 대신 그 과정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포근함’이라는 감각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고민했다.

예술적 영감에 의존해 지은 듯 우아한 건물은 사실 무척 합리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두 동의 숙소와 하나의 주거 공간이 서로 방해받지 않도록 모두 다른 동으로 떨어져 지었다. 손님 영역과 주거 영역이 서로를 침해하지 않도록 각각의 마당을 두었다. 또 손님 영역과 주거 영역 사이에 주방과 다용도실을 두어 모든 집을 함께 돌볼 수 있도록 했다. 또 포근함이 자칫 답답함이 되지 않도록 타인의 시선을 피해 창문을 뚫고, 가장 내밀한 공간인 욕실에서까지 개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욕실과 외부를 은근하게 연결했다.

건축주는 이미 게스트하우스 운영 경험이 있는 젊고 세련된 부부였다. 낮은 땅에 낮은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해, 또는 설명하기 어려운 디자인 어휘를 그들은 쿨하게 받아들였다. 무신경해 보이기까지 하던 그들이 달라진 것은 건물의 얼개를 구상한 뒤 구체적인 계획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숙박객들은 좋은 분위기와 말끔한 위생, 산뜻한 응대 정도만 있으면 성공적인 숙박 경험이었다며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건축주 부부는 오성급 호텔에나 있을 법한 섬세하고 정확한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침구를 세탁하는 방법, 게스트하우스를 청소하는 시간과 순서, 재질에 따라 물이 마르는 속도, 침구 옆에 있어야 할 것 등 잠잘 곳을 대하는 노하우와 지침을 열심히 설명했다.

공사가 시작되자 건축주는 본격적으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늘 조심스럽고 신중하던 남편은 부지런한 일꾼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매일 현장에 가서 간섭하기도, 현장에서 필요한 부품을 급하게 구해다 주기도 했다. 그리고 꽤 여러 번 설계자 대신 현장을 확인하기도 했다. 모두 그가 자원한 일이다. 대화에 미사여구가 많지 않던 아내는 손님을 받기 몇 달 전부터 손님에게 내놓을 음식을 만들어 먼저 맛보게 해주고, 숙소에 어울릴 만한 향기의 비누를 만들어 먼저 사용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약간의 대화를 나눈 후엔 여느 때처럼 휙 돌아 주방으로 걸어갔다.

꾸밈없이 정직하던 콘크리트 건물은 그렇게 조금씩 디테일을 더해갔다. 손님 방에 침구를 옮길 때 비를 가릴 수 있도록 캐노피를 설치했고, 자투리땅 곳곳에 사적인 정원을 더했다. 게스트하우스 입구에는 바다에 다녀와 발을 씻을 수 있는 작은 수돗가를 두었다. 창을 열면 툇마루처럼 걸터앉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