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도시의 여백이 되다

[Story] ‘티루프’ 공간 이야기
©Kyung Roh
에디터. 윤정훈  사진. 노경, 윤현기  자료. 소수건축사사무소

 

① 집, 도시의 여백이 되다 — ‘티루프’ 공간 이야기
② [Interview] 일상의 질서를 재편하는 법 — 사소하지만 작지 않은 변화

③ [Architects] 다수를 위한 소수의 건축 — 고석홍, 김미희 소수건축사사무소 소장


 

성내동 세 지붕 집
서울 강동역 뒤편, 오래된 주택이 즐비한 성내동 골목을 걷다 보면 높다랗게 솟은 박공지붕을 만날 수 있다. 세 개의 삼각형이 겹쳐 하나의 지붕을 이루는 건물의 이름은 ‘티루프T(ri)-roof’. 엇비슷하거나 제 목소리를 내기 바쁜 건물들 틈에서 티루프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티루프는 주택과 근린생활시설이 복합된 5층짜리 상가주택이다. 아버지와 두 딸 모두 성내동에서 나고 자란 가족은 낡고 오래된 집을 두고 신축과 아파트를 고민했다. 상가주택은 현실과 이상을 모두 고려한 결정이었다. 정든 동네를 떠나지 않고 ‘집다운 집’을 갖는 동시에, 건축비 충당 및 노후 대비를 위한 임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지역 업체에 의뢰해 뚝딱 건물을 지을 수도 있었지만 다름 아닌 ‘우리가 살 집’을 마련하는 일이기에 손품, 발품을 팔아가며 건축가를 물색했다.

 

©Kyung Roh

 

흔한 상가주택이 말하는 것
흔히 상가주택 하면 1층 필로티에 주차장과 카페, 2~3층에 원룸, 최상층에 주인 세대가 사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임대 수익이 우선 되는 이러한 건물의 경우 건축비 절감과 임대 공간 확보 과정에서 주거의 질과 다양성, 동네 풍경에 미치는 영향 등은 쉽게 간과되곤 한다. “임대 수익을 기대하는 주택을 의뢰할 때 건축주들이 개인의 삶의 요구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안 하는 편이에요. 대개 얼마나 더 많은 임대 공간을 구성할 수 있을지를 중점적으로 말하죠. 하지만 건축주 또한 좋은 환경에서 살기 위해 집을 짓는 거라면, 삶의 공간이 주가 되고 그 다음 수익을 높이는 법을 모색해도 늦지 않아요.” 

 

©SOSU architects

 

건축가는 좁은 골목에 들어서는 상가주택이 그 자체로 좋은 집과 좋은 건축물에 대한 하나의 질문으로 남길 바랐다. 따라서 방의 개수나 크기에 앞서 그곳에 담길 삶을 먼저 생각했다. 오래도록 이곳에 살 가족과 잠시 머물 이들의 시간이 보다 다채로워지도록 건물 안팎 구석구석을 세심히 만졌다. 동시에 복잡한 도시의 여백으로 자리하기를 바랐다. 이에 바닥부터 지붕 꼭대기까지 건물을 한 종류의 벽돌로 덮었다.
건물은 개인의 소유이지만 좋은 건축물의 자질은 사용자는 물론 이따금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넉넉함에 있을 것이다. 티루프가 작은 정원과 테라스로 거리에 미세한 표정 변화를 더하게 된 까닭이다. 특별할 것 없는 성내동 골목을 지나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다면 초록색 우레탄 옥상 사이 차분히 내려앉은 회백색 지붕이 눈에 띄었다면, 티루프가 건네고자 하는 이야기가 가닿았다는 뜻일 테다.

 

좁고 긴 땅에 대처하는 자세

 

교회도 관공서도 아닌 집
티루프는 강동역 인근 천호대로 이면에 위치한다. 천호대로를 기준으로 북쪽은 대규모 주상복합과 오피스텔이 모인 일반상업지역이고, 티루프가 있는 남쪽은 주거와 상가로 구성된 일반주거지역이다. 고층빌딩숲과 오래된 주거지 사이 놓인 건물은 언뜻 불시착한 비행선을 연상케 할 정도로 낯설다. 공사를 마칠 즈음,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건물의 정체를 추측하기 바빴다. 누군가에겐 교회 건물처럼 보였고 누군가는 응당 구청에서 짓는 건물이 아니겠냐며 지나갔다고. 그만큼 동네에서 흔치 않은 모양새였던 것이다.

 

©Kyung Roh

 

골목을 생각하다
대지는 폭 8m, 길이 30m에 달하는 좁고 긴 땅으로 북측사선제한까지 적용된다. 법규와 용적률에만 충실한 획일적 외관에 그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후퇴하는 형태에 박공지붕을 얹었다. 대지 길이가 인근 단위 필지에 비해 2배 이상이므로 가로 풍경에 적잖은 영향을 줄 터였다. 실제로 강동역과 인근 전통시장을 잇는 길목에 있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기도 하다. 건축가는 새롭게 들어설 건물이 거대한 장벽처럼 보이지 않도록 건물을 수직, 수평으로 분절했다. 2층 테라스와 1층 조경은 골목에 작게나마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 제스처다. 지붕을 따라 실내에 삽입된 간접등은 저물녘 거리를 지나는 이들에게 따뜻한 집의 인상을 전달한다.

 

©BRIQUE Magazine

 

건강한 빈틈을 만들다
건축주 주택은 맨 꼭대기 5층에 자리한다. 겉보기엔 한 층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공간은 3개 층이다. 건축가는 복층 구조와 다락을 통해 길고 좁은 공간의 활용도를 십분 높였다. 본래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5층과 다락만 쓰는 것이었으나 필요한 공간을 모두 넣기엔 면적이 다소 협소했다. 이에 5층에 주방과 안방, 드레스룸을 일렬로 배치하고 긴 다락부를 거실과 서재로 꾸몄다. 두 딸의 방은 4층 일부를 활용했다. 층별로 실을 적절히 분리한 덕분에 가족은 부담 없이 모이고 흩어질 수 있게 됐다.

 

5층 주방 ©Kyung Roh
건축주 가족 ©BRIQUE Magazine

 

주방은 길게, 거실은 다락에
이 집의 중심축은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주방이다. 웬만한 식사는 집에서 함께 한다는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것으로, 식사 장소만이 아니라 공용 공간으로 톡톡히 기능한다. 주방 한쪽에 작지만 특별한 휴게 공간을 마련한 덕택이다. 큼지막한 창 아래 모서리에 딱 들어맞는 평상이 있어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을 바라보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 좋다. 주방을 제외한 다른 공간은 다소 협소한 편임에도 너른 주방으로 인해 체감 면적은 훨씬 넓다. 다락의 절반은 서재 및 건축주 업무 공간으로, 다른 절반엔 TV와 소파를 두어 기존의 거실 기능을 유지했다.

 

5층 복도와 안방 ©Kyung Roh
4층 자매방 ©BRIQUE Magazine

 

사계절 은은한 빛이 감도는 집
사선제한을 받지 않는 남쪽에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배치함에 따라 집은 불가피하게 북쪽을 향하게 됐다. 하지만 북향의 장점은 과도한 직사광선에서 자유롭다는 것. 주방과 침실을 잇는 복도를 따라 길게 난 창에는 블라인드가 없다. 한여름 정오에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은은한 빛이 집안에 들기 때문이다. 복도와 면한 테라스에는 야트막한 담장을 두어 복잡한 도시 경관을 정제했다. 여기에 폭이 좁아 활용이 어려운 공간을 식물로 풍성히 채워 가족만을 위한 정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덕분에 자칫 삭막할 수 있는 창밖 풍경이 한결 산뜻해졌다.

 

다락에 배치된 거실 ©Kyung Roh
다락에 배치된 서재 ©BRIQUE Magazine
©Kyung 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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