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Space] 연희동 골목집, '집 안에 골목'
ⓒ Kyung Roh
에디터. 김윤선  사진. 노경, 최진보  자료. 푸하하하프렌즈

 

서울 연희동. 어느 오랜 주택가를 지나 뒷산으로 가는 길인 연희로11마길에는 계단 골목 여럿이 어떤 초록의 잎맥처럼 촘촘히 자리를 잡고 있다. 집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계단은 누군가의 그럴싸한 상상을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계단에서 사람들이 인사도 나누고, 책도 읽었으면 했던 건축가는 이 계단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집 안으로 계단을 끌고 들어가기로 했다. 작은 상상은 곧 집의 시작이 됐다.

 

ⓒKyung Roh

 

연희동 그 골목길

집은 골목으로부터
집 옆을 지나는 계단 골목은 건축가에게 여러모로 재미있는 요소였다. 평탄한 대지보다 난관은 있지만 새로운 생각을 촉진하는 에너지의 근원이 되었다. 집과 집 사이에 계단 골목이 있었던 것처럼 방과 방 사이에 계단을 두었다. 처음에는 이 계단을 외부 계단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계절마다 안팎의 기온 차가 큰 우리나라 기후 조건 상 벽 두께가 두꺼워짐에 따라 가용 공간도 줄어들어 실현되지 못했다.

 

ⓒBRIQUE Magazine
ⓒKyung Roh
ⓒKyung Roh

 

경사지 계단 집의 가능성
대지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1개 층의 높이차가 있는 경사지에 위치한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계단 골목을 거쳐야 한다. 북쪽은 도로에 접하고 남쪽은 축대로 막혀 있어, 집의 정면이 북쪽에 면한 북향집으로, 집으로써 최상의 조건은 아니었다. 다만 축대에 막힌 지하1층은 마치 1층처럼 북쪽 도로에서 바로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연면적에 영향을 주지 않는 지하로 인정돼 용적률 확보 면에서도 유리한 상황.
이러한 조건과 상황을 십분 활용해 지하 1층은 임대를 위한 근린생활시설로 계획했다. 집이 시작되는 1층(북쪽 도로에서 볼 때는 2층)에도 일부 공간을 활용해 임대를 위한 다가구주택(원룸)을 두었다. 원룸과 집 사이 벽은 필요시 공간을 통으로 터서 활용할 수 있도록 조적벽으로 쌓았다.

 

ⓒKyung Roh
지하 1층 평면도 ©FHHH Friends

 

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방은 원래 방이 아니었다
네 식구가 사는 집이라고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개방적인 구성을 가졌다. 벽과 문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중앙에 거실이 있고, 복도를 따라 방이 벽으로 빽빽이 나뉘어 있는 아파트식 평면에서 완전히 벗어난 구조다. 예로부터 ‘방’은 잠도 자고 밥도 먹고 놀이도 하는 포괄적인 공간이었다. 동시에 구획된 작은 개실을 넘어서 건물 전체를 이야기하는 개념이기도 했다.

 

©Kyung Roh
©Kyung Roh

 

움직이는 집
1층에는 부엌과 거실, 2층에는 부부와 아이들의 침실, AV 룸과 아이들의 공부방을 겸하는 작은 거실 공간을 두었다. 필요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여닫이문이 문이자 벽의 역할을 하고, 이 문과 벽의 움직임에 따라 경계 없는 ‘공간’은 ‘방’으로 구획된다. 건축가는 집이 살아 있기 위해선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끝없이 자유롭게 뛰어놀고, 가족이 어디서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살아 움직이는 집 말이다.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질 공간에 대한 대비도 빼놓지 않았다. 지금은 함께 침실을 쓰는 아이들이 자라 각자의 방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 공부방 겸 거실은 새로운 방으로 변신할 것이다.

 

2층 거실 겸 공부방 ⓒKyung Roh

 

단 차로 공간 나누기
벽과 문을 최소화한 대신, 단 차이로 입체적인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부부의 침실은 지면으로부터 무릎 높이쯤 올라와 있다. 1층 부엌과 거실 사이, 2층 침실과 거실 사이에도 한 단 또는 두 단의 계단을 두어 공간을 구분했다.

 

ⓒKyung 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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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QUE Magazine
1층 평면도 ©FHHH Friends
2층 평면도©FHHH Friends

 

집 안에 골목이 있다면
집 밖으로부터 시작된 골목은 집 안에서도 이어진다. 골목은 집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며 끝없이 연결된다. 계단은 집 밖에 있던 골목으로부터 이어져 집 안으로 끝이 없는 길을 연장한다. 이 집에는 막다른 길이 없다. 모든 공간을 관통하는 순환 동선이 집 안을 계속해서 연결한다. 이러한 속성은 집을 둘러싼 외부 공간에도 적용되었다. 원형의 집 둘레에도 집 밖으로부터 시작된 골목길이 계속된다.

 

ⓒKyung Roh
현관에 들어서면 보이는 풍경 ⓒKyung Roh
ⓒKyung 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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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향집엔 남쪽 창을
북쪽 도로를 제외한 나머지 세 면 모두 다른 건물을 면하고 있어 채광 조건이 불리했다. 더불어 사생활 보호를 위한 대책도 세워야 했다. 도로에 접한 북쪽이 집의 정면으로, 창을 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지만 창을 내어도 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북향집의 숙명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도심 속 집의 과제는 창으로부터 시선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겸한다. 이를 모두 충족하기 위해 집의 층고를 높여 남쪽에 고측 창을 두고, 바깥 시선을 피하고 싶은 곳엔 눈높이를 벗어난 곳에 창을 두는 묘안을 냈다. 거실에는 전면 창 대신 눈높이 아래 벽을 따라 길쭉한 라운드 창을 두어 외부를 차단했다. 고측 창은 개방감을 선사하고 창 대신 자리를 차지한 넓은 벽은 남쪽 창으로부터 들어온 빛을 다시 거실로 반사하는 역할을 한다. 큰 창만이 언제나 능사는 아니다.

 

1층 거실 ⓒKyung Roh
AV룸 ⓒKyung Roh

 

계단실 랑데부
집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계단 위로는 과감하게 유리로 된 천창을 두어 부족한 채광을 보충했다. 그간 천대받아오던 계단실은 이 집에서 가장 밝고 경쾌한 대화의 장소이자 만남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널찍한 계단에서 가족은 책을 읽고 대화도 나눈다.

 

계단실 위 천창 ⓒKyung Roh
ⓒKyung Roh

 

눈으로 만지는 집의 감촉
평범한 벽돌집처럼 보이지만 흔치 않은 재료가 쓰였다. 벽돌은 단종되어 구하기 힘든 거친 벽돌을 구해 사용했고, 보통 스테인리스 스틸을 적용하는 배수관과 트렌치는 일부러 녹슬게 한 금속을 썼다. 바닥 역시 고압 호스로 물을 쏘아 표면을 갈아 울퉁불퉁하게 표현했다. 건축가는 땅으로부터 뻗어 나온 ‘바위산’ 같은 걸 몇 번이고 떠올렸다. 골목이 집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듯이, 건물도 땅으로부터 연결되어 있음 직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세월에 입은 상처를 드러내는 듯한 거친 벽돌 표면과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줄눈의 모르타르는 단단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조형감을 만들어냈다.
감각은 때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만지지 않은 것을 느끼게 한다. 건축의 질감은 그 형태보다 강렬하고 시간의 흔적은 우리로 하여금 집에 얽힌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Kyung Roh
ⓒKyung Roh
ⓒKyung Roh

 

 

‘집 안에 골목’ 전체 이야기 담은 <브리크brique> 종이잡지 vol.5

©BRIQUE Magazine

*책 자세히 보기      https://magazine.brique.co/book/vol-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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