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동네생활

[Near my home] ⑧ 직주근접 동네 생활자, 심영규 주식회사 정음 대표
ⓒBRIQUE Magazine
에디터. 김윤선  사진. 최진보, 나르실리온  자료. 정음철물

 

요즘 부동산 시장에서 주목받는 신조어가 있다. 바로 ‘슬세권’이다. 슬세권이란 ‘슬리퍼’와 ‘역세권’의 합성어로 슬리퍼를 신은 편한 복장으로 카페와 극장, 마트, 은행 등 생활편의시설을 누릴 수 있는 세력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밖에도 스타벅스, 맥도날드와 가까운 곳을 뜻하는 ‘스세권’, ‘맥세권’도 등장했다. 배경에는 시간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인들의 욕구와 그에 따른 소비 패턴이 있다. 이들이 이동 거리가 짧은 집 근처, 동네의 영역에서 누릴 수 있는 인프라를 찾고 소비하면서 자연스레 생활편의시설이 동네로 모여들며 새로운 세력권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결국 내 집과 동네, 그 사이의 콘텐츠와 커뮤니티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연남동과 연희동에 10년 넘게 거주 중인 심영규 주식회사 정음 대표는 일터와 삶터를 근거리에 둔 ‘직주근접’을 실천하고 그야말로 슬세권을 누리는 1인 가구 ‘동네 생활자’다. 그는 연남동에 살고 10분 거리에 있는 연희동에서 정음철물을 운영하며 동네 콘텐츠를 개발한다. 심영규 대표를 만나 동네에서의 일과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심영규 주식회사 정음 대표 ⓒBRIQUE Magazine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사는 이유가 있나요?

직장생활을 하던 2010년부터 연남동에 살기 시작했어요. 원래 합정동에 살고 싶었는데 집값이 비싸 저렴한 곳을 찾다가 근처 연남동까지 오게 됐죠. 당시 연남동은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였어요. 조용하고 오래된 주거지였는데 기사식당 등 먹을 곳이 많고 집값이 적당했고요. 당시 다니던 회사와도 멀지 않아서 모든 면에서 조건이 맞았어요. 그러다 2012년에 공항철도가 개통되고 2014년에 경의선 부지가 숲길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땅값이 7~8배 뛰는 걸 목격했어요. 임대료가 비싸지니 단골집들도 사라져서 2017년에 연희동으로 이사했다가 작년에 다시 연남동으로 왔어요. 10년간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던 건 동네를 중심으로 한 생활 환경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동네에서 만난 친구나 지인들 때문이에요.

 

키 낮은 근린생활시설과 주택 등이 섞여 있는 연남동 어느 골목 풍경 ⓒBRIQUE Magazine

 

강남에 있던 사무실도 최근 이 동네로 옮기셨다고요.

업무 특성상 프로젝트 베이스로 다양한 일을 하는데, 일 때문에 2~3년 정도 신사동에서 일했어요. 협업이 필요한 관련 팀들이 다 그쪽에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정음철물을 운영하면서 아예 2층에 사무실을 마련해서 옮겼어요. 연남동에 살고, 10분 거리에 있는 연희동에서 일하면서 직주근접의 삶을 살고 있죠. (웃음) 일터와 삶터가 가까운 만큼 일과 삶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는데, 오히려 저한테는 그게 행복이에요. 한가지 꿈이 있다면 연희동에 있는 2층짜리 마당 딸린 넓은 단독주택을 사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모여 사는 겁니다.

 

‘직주근접’은 도심 공동화 현상을 방지하고 교통체증을 억제하는 등 도시 계획과 관리 면에서도 중요한 과제로 여겨져 왔어요. 실제 그런 삶을 실천하고 있는데, 득과 실이 있다면요?

저는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여기에선 걸을 수 있는 근거리 안에서 생활의 모든 걸 다 해결하니까 그럴 일이 없어요. 또 한 가지는 제가 지방이나 해외 출장이 많은 편인데, 공항철도가 가까워 집에서 공항까지 30분, 서울역까지 20분이면 갈 수 있어 좋아요. 이렇게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골집과 이웃, 인사할 동네 친구와 커뮤니티가 생겨요. 삶이 더 풍요로워지죠. 재밌는 건 일터가 있는 연희동은 서대문구이고 집이 있는 연남동은 마포구라는 점인데, 이전까지는 같은 연희동이었다가
1975년에 연남동이 분리되었어요. 연남동은 제2종일반주거지역이라 주택뿐 아니라 근린생활시설이 많고요. 홍대와 가깝기도 해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 늘 번화하죠. 맛집도 많고, 외국인 여행자가 머무는 게스트하우스도 많아요. 반면 연희동은 제1종일반주거지역 또는 제1종전용주거지역으로, 단독주택이 많아 주거지 느낌이 훨씬 강해요. 필지 종류와 건물 높이가 다르고 그에 따라 상권도 달라져, 비슷해 보이지만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요. 그래서 제게 연남동은 놀고 휴식하는 공간, 연희동은 일하는 공간이에요. 일과 삶이 엮여있지만 자연스럽게 전환이 됩니다.

 

현재 연희동에서 ‘정음철물’을 운영하고 계시죠. 어떤 곳인지 소개해주시겠어요?

정음철물은 원래 오디오 수리점인 정음사로 시작해 30여 년간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해온 정음전자를 리뉴얼해 재탄생시킨 공간이에요. 연희동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시공사인 ‘쿠움파트너스’의 김종석 대표님이 정음전자를 운영했고 쿠움파트너스와 어반플레이, 그리고 제가 힘을 합쳐 정음철물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공간 및 인테리어 분야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를 위한 철물편집숍이자 동네 집수리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연희동에 낡은 단독주택이 많아 집수리 수요가 높다는 점에서 착안했죠. 목공이나 전기 수리가 주를 이루는데, 정음전자 시절부터 동네에서 15~20년간 활동하셨던 베테랑 기술자분들과 파트너로 협력하고 있어요. 그분들께 업혀 간달까요. (웃음) 동네의 역사가 묻어 있는 공간인 만큼 기존 자원과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했죠.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브랜드와 크리에이터의 제품을 만날 수 있는 팝업 쇼룸을 통해 매달 전시도 열어요. 한편에 마련된 스튜디오 공간은 정음철물의 유튜브 채널 ‘철물TV’ 영상을 제작하는 곳인데, 이를 통해 기술자분들과 함께 간단한 공구 사용 방법이나 안전 수칙 등을 전파하고 있어요.

 

옛 정음전자 간판을 그대로 살린 정음철물 매장 전경 ⓒNarsilion

 

혹시 주변 철물점 사장님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지는 않았나요?

처음에는 긴장하셨는데 바로 안심하시더군요.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아셨죠. (웃음) 흔히 찾는 기본 철물은 일부 마련해 놓았지만, 기존 철물점과 같은 제품을 판매하지는 않거든요. 건자재 제품을 비롯해 정원용품이나 조명, 문고리, 작은 가구, 의류나 가방 제품 등을 전시, 판매하는데, 저희가 선보인 브랜드 중에 공교롭게도 정음철물처럼 오래된 브랜드를 리브랜딩한 브랜드도 있었어요. 라이마스는 그 전신이 삼일조명이고, 레어로우는 철제가구 브랜드 심플라인을 리브랜딩한 사례인데 둘 다 부모 세대가 1970년대 창립한 전통과 자원을 가진 브랜드를 2세들이 재해석해 새롭게 탄생시켰어요. 양질의 제품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소개하기 때문에 정음철물이 철물편집숍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거고, 고객들의 만족도도 높아요.

 

ⓒNarsi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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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음철물 외에도 2층에 정음연구소와 정음제작소를 통해 다양한 일을 하시는 거로 알아요.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정음연구소는 도시 라이프스타일 컨설팅 회사로 기업과 지자체를 상대로 공간 기획과 운영 컨설팅을 하고 있어요. 정음제작소는 정음철물의 워크숍 공간으로, 주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요. 얼마 전에는 무인양품과 협업해 목공 수업 ‘나 혼자 만든다’, 전기 수업 ‘나 혼자 고친다’, 정원 수업 ‘나 혼자 가꾼다’ 클래스를 열기도 했어요. 이곳은 공유오피스로도 쓰고 있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협업이 일어나기도 해요. 1층 정음철물이 편집숍과 컨시어지 서비스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다면, 2층 정음연구소, 정음제작소가 이를 온·오프라인으로 서포트하는 입체적인 구조예요. 정음철물과 같은 소매점에서 가장 힘든 건
마케팅이에요. 이를테면 요리사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만들어도, 그 음식이나 음식점을 홍보하는 일은 어려울 수 있거든요. 소상공인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대부분 그렇고요. 저는 기자 출신이라 리테일에 미디어를 접목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온라인으로는 철물TV를, 오프라인으로는 팝업 전시와 교육을 진행하면서 1층과 2층이 서로 엮이고 돕는 구조로 가도록 만들었어요.

 

ⓒNarsilion

 

로컬 혹은 동네 기반 콘텐츠와 공간 비즈니스의 움직임이 활발한 요즘이에요. 어떻게 보고 계시나요?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집중화 전략이에요. 수도권에 모든 자원과 인재를 모아 고밀도 도시를 계획해 효율성을 높였죠. 그런 방식이 도시뿐 아니라 우리 삶 깊숙이 침투해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 오니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도심에 모든 자원이 모여 있으니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과의 갭이 커졌고, 이제는 그걸 분산시킬 필요를 느끼고 있죠. 저성장 시대로 가면서 지속 가능한 전략을 다시 짤 시기가 왔고, 집중된 걸 해체해서 잘 퍼뜨려야겠죠. 그게 지금 대기업이 로컬리티를 찾고 있는 이유이기도 해요. 지역이 가진 개성을 발견해 어떻게 상품화시킬지에 관심을 두고 있죠. 정음철물과 같은 작은 매장에 백화점이 입점 제안을 하고 투자사가 투자 제안을 하는 게 그런 이유라고 봐요. 헤게모니가 바뀌었거든요.
결국,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콘텐츠를 발굴하고, 그걸 잘 활용하는 일이죠. 그 일환이 제게는 정음철물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집과 동네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요? 나아가 좋은 집, 그리고 좋은 동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나.바.다 도시’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도시가 되어야 동네도 집도 지속 가능할 것 같아요. 아껴 쓰는 건 협소주택, 나눠 쓰는 건 공유, 바꿔 쓰는 건 용도 변경, 다시 쓰는 건 리모델링을 말해요. 사실 2016년부터 계속해온 이야기인데, 좀 촌스럽나요? (웃음) 하지만 지금도 이 이야기가 유효하다고 봐요. 자원이 한계가 있으니까 기존 자원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당연히 있을 거고요. 아나바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커뮤니티고, 그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중요한 건 사람들의 생각이에요. 요즘 유행하는 노래 중에 ‘아무노래’라고 있어요. ‘클럽은 재미없고 우리 집 거실로 모이라’는 가사가 있거든요. (웃음) 코로나19의 여파도 있겠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집에서 새로운 모임을 만들고, 그 모임을 통해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일이 많아질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커뮤니티죠.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가운데, 집과 동네의 가치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다시 좋은 집과 좋은  동네를 만들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Near my home] 동네가 내 집이 된다면

글 싣는 순서 :

① 집 밖으로 나온 우리집 공간 ‘프로젝트 후암’
② 커피향 흐르는 해방촌 세탁방 – 세탁기와 커피가 함께 있는 카페 ‘론드리 프로젝트’
③ 쌓인 책은 줄이고, 없는 책은 빌리고 – 온라인 공유 도서관 ‘국민도서관 책꽂이’
④ 누구나 창고는 필요하다 – 삶을 담는 그릇, ‘미니창고 다락’
⑤ 짐을 비우고 삶을 채우세요 –  짐에 대한 연구보고서 ‘오호’
누구나 주인이 되는 술집 – 매일 주인이 바뀌는 영등포 커뮤니티 바 ‘삼만항’
연남·연희 ‘플레이’ 리스트 – 동네의 숨은 콘텐츠를 찾아서, 어반플레이의 ‘쉐어빌리지’
⑧ 슬기로운 동네생활 – 직주근접 동네 생활자, 심영규 주식회사 정음 대표
우리 동네에서 살아볼래요? – 블랭크가 만드는 공간, 동네, 지역
⑩ 오래된 동네를 밝히는 여덟 개의 풍경 – 서울역 일대 도시재생 거점시설
회현동 골목 어귀에 숨겨져 있는 동네 사랑방 – 여든다섯살 적산가옥의 새로운 쓰임 ‘회현사랑채’
서계동을 밝히는 색다른 시도 – 서울을 품은 마을카페 ‘청파언덕집’

 

‘심영규 대표’ 인터뷰 담은 <브리크brique> 종이잡지 vol.3

 

ⓒBRIQUE Magazine
*책 자세히 보기           https://brique.co/book/brique-vol-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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