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와 공간이 함께 짓는 이야기

[Be Curated] ⑤ 총체적인 경험의 공간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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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정경화  사진. 윤현기, 피크닉  자료 제공. 피크닉

 

‘큐레이션curation’은 과거 미술관, 박물관에서만 사용하던 용어였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와 상품에 노출되는 지금, 큐레이션이라는 말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널리 쓰인다. 큐레이터는 더 이상 학예사만을 뜻하지 않으며 큐레이션의 대상 역시 예술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뉴스, 책, 음악, 소품, 공간, 심지어 사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일상을 압도하는 정보 과잉으로 인해 모든 것이 필터링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남다른 안목과 뾰족한 취향으로 일상의 속 더 나은 선택을 제안하는 이들을 만났다. 콘텐츠를 선별해 맥락과 가치를 부여하는 그들에게 큐레이션이란 ‘크리에이션creation’이다. 밀도 높은 취미이자 비즈니스 수단, 또 다른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다. 무분별하게 넘쳐나는 정보 가운데 그들이 구심점으로 삼은 것은 무엇일까. 온오프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써내려간 고유한 이야기들을 통해 일상 속 더 나은 선택, 나다운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Be Curated
① 시간이 쌓이며 더욱 공고해지는 세계 — 더레퍼런스
② 머물고 싶은 순간 — 리플레이
③ 나에서 시작해, 우리가 투영되는 — TWL
④ 가장 예술적이면서 동시에 대중적인 — 라이카시네마
⑤ 전시와 공간이 함께 짓는 이야기 — 피크닉
Life Curators
My Space Museum

 


 

‘피크닉’은 2018년 전시기획사 글린트의 플랫폼으로 시작해 현재 서울을 대표하는 전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고유한 관점으로 주제를 선정하고 그들만의 언어로 조직한 전시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전시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채로운 공간 또한 글린트가 행하는 큐레이션의 결과물이다. 전시장과 레스토랑, 카페와 같은 실내 공간부터 정원과 옥상까지 피크닉의 모든 공간이 하나로 엮여 방문객에게 총체적 경험으로 다가온다. 글린트 김범상 디렉터를 만나 그들이 큐레이션하는 방식과 이를 전시와 공간이라는 가시적인 형식으로 전개, 확장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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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전시를 업으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요. 어떤 계기로 전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영화를 공부했고 각본을 쓰거나 연출부 일을 하면서 데뷔를 준비했어요. 그때부터 창작자보다는 비평가나 저널리스트가 더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저 또한 직접 글을 쓰거나 영화를 만드는 일보다는 무언가를 기획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만, 큐레이터는 막연히 미술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기지는 않았죠. 그러다 우연히 전시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에 발을 들이게 됐습니다.

 

그 전시는 어떤 계기로 기획하게 되었나요?
당시 ECM 소속 아티스트의 내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ECM 본사에서 이를 전시의 형태로 기획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예전부터 좋아하던 레이블이라 경험은 없었지만 제가 하겠다고 했죠. 그리고 뮌헨에 위치한 미술관, 하우스 데어 쿤스트Haus der Kunst에서 열린 ‘ECM–문화의 고고학ECM-a cultural archaeology’ 전시에 초청받아 관람하게 됐는데, 이것보다 잘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잘될 거라는 예상보다는 자아실현에 가까웠어요. 전시 초반에는 관객이 하루에 30~40명이었는데,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끝날 즈음에는 매일 천 명 이상 방문했습니다. 그 경험을 한 이후, 다양한 주제로 좀더 전시를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다음에 선보인 전시가 즐거운 나의 집이었죠.
그때는 국내 전시 신scene이 지금처럼 다채롭지 않았어요. 국공립 기관의 전시도 특출나지 않았고 대림미술관에 젊은 관객들이 모이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건축가들과 공간 비즈니스를 준비 중이었는데, 그때의 생각을 바탕으로 기획한 전시가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당시 꽤 화제가 되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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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닉은 어떤 계기로 열게 되었나요?
전시를 기획할 때마다 적합한 공간을 찾는 일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비용이나 일정 같은 조건을 맞추기가 까다롭고 그런 공간 자체도 많지 않았습니다. 마침 사무실 계약 기간이 끝나서 알아보던 차였는데,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숨겨져 있던 이곳을 보고 앞으로 이 위치와 규모에, 이 가격으로 이런 곳을 얻기는 쉽지 않겠구나싶었습니다. 빚을 왕창 내어 건물을 계약하고, 리노베이션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전시 공간만 생각했는데, 미술관에는 숍이나 카페가 함께 있잖아요. 그곳이 잠깐 앉았다 가는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매력적인 장소이기를 바랐습니다. 자연스레 카페와 숍, 레스토랑이 함께있는 형태가 됐죠. 사람들이 피크닉 공간을 좋아하다 보니 전시와 연계된 강연이나 토크, 전시 등의 작은 행사도 가능하게 됐고요.

 

피크닉 공간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 낸 과정이 궁금합니다.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이자 부담 때문에 설계와 시공을 엄청 급하게 했거든요. 경험이 없어서 몰랐던 점도 많았고요. 예를 들어 전시장에서 층고가 이렇게까지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전시 공간과 레스토랑이 함께 있는 상황도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어요. 한쪽에서는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코스로 저녁 식사를 하는데 바로 옆에서는 전시 준비 때문에 공사를 해야 했어요. 피크닉은 올 때마다 다른 느낌이라 좋다는 피드백을 많이 듣는데, 모두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입니다. 지금은 그런 면이 오히려 매력이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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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난관으로 인해 생겨난 요소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었나요?
전시 공간이 되기에 입구는 좁고 층고는 낮았어요. 층고가 서로 다른 공간을 연결해 전시실을 만들다 보니 언덕 같은 지형이 생겼습니다. 또 처음에는 입구를 이쪽에 뒀다가 공간이 부족하니 바꾸기도 하고, 정원을 만들려고 보니 야외를 전시 공간으로 포함시키려면 막아야 하니까 문을 새로 내기도 하고요. 이런 이슈가 끊임없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경험미숙이 오히려 창의성을 가능하게 했죠. 입구나 엘리베이터가 정해져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다양한 동선이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몇 년 후에 주변 건물까지 포함해 확장하고 싶은데, 그때는 좀 더 정리 정돈을 해서 제대로 된 미술관이 되고 싶습니다.

 

기존의 화이트 큐브 갤러리, 공공 미술관이 1세대라면 피크닉이나 그라운드 시소는 2세대 전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공급자 중심인 기존의 미술관이나 문화 공간에서 부족하다고 느꼈던 점을 나름의 방식으로 바꿔 나간 결과입니다. SNS나 공간에 대한 관심을 적극 이용했고요. 흥미로운 주제를 더 깊이 있게 다루면서도 보다 정서적으로 접근하고, 친절하게 소개하려 했습니다. 단순히 작품을 모아 전시하는 것을 넘어 작가가 추구했던 배경이나 열정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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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피크닉의 전시는 삶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읽힙니다. 전시와 공간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은, 예술이 내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알고 있다와 같은 현학적 교양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저희의 전시를 본 후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분명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더 깊어지고, 삶이 풍부해지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필요 이상 계몽적이거나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의지가 지나치지 않도록 경계선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지금 피크닉의 전시에서 짓는 경계는 어느 정도인가요?
예를 들어 베니스비엔날레는 전시장에 작품이 산재해 있고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따라가기 어려워요. 이 작품이 왜 여기 있고 무슨 의미를 품고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과 공부가 필요합니다. 제 기준은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전시를 꼼꼼히 살펴보면, 이 작품이 어떤 의미로 여기에 놓였는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월간 ‹SPACE›와 ‹brique›에 비교하자면 저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인 거죠.

 

©pik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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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주제는 어떻게 선택하나요?
기본적으로는 저의 관심사에 기반해 선정합니다. 지금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이 관심이 있는지, 실제 물리적으로 구현이 가능한 조건인지 등을 함께 고려하고요.

 

최근 전시의 주인공인 프랑수아 알라르에는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사울 레이터Saul Leiter의 전시를 준비할 때, 텅 빈 그의 아파트를 찍은 사진을 가져오면서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그가 작업에서 공간과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많은 흥미를 느꼈어요. 사람들이 남의 집에 대해 갖는 관심과 욕망을 바탕으로 그의 사진 속 공간에 등장하는 인물에 호기심을 갖고, 자연스레 20세기 문화사를 공부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탈리아나 그리스, 남프랑스의 풍경이 봄과 여름의 피크닉과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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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만큼이나 이를 잘 소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화이트 큐브가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한다면, 이곳은 하나의 이야기로 읽히게 하는 힘이 있어요. 의도한 건가요?
드라마나 이야기는 때로 계몽적일 수도 있지만, 또 그것만큼 사람에게 잘 스며드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핵심은 스토리가 만드는 정서입니다. 하지만 뻔해지거나 유치해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편안하게 다가가려 합니다. 다만, 이런 방법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명상(Mindfulness)전은 하나의 동선으로 구성하다 보니, 관람 방식이 너무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있었어요.

사울 레이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전시에서는 뮤지션이 사진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음악을 전시장에 틀어 두었는데 인위적으로 감성을 자아낸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습니다. 많은 분이 좋아했던 전시이지만, 한편으로는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지나치게 단일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고민합니다.

 

콘텐츠를 엮는 방법론이 있나요? 선호하는 배치 방식이 있다면요.
특별한 방법론은 없습니다. 다만 시작과 끝에 대한 생각은 해요. 정원 만들기는 땅으로 시작해 노동으로 끝납니다. 사울 레이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는 초기작인 흑백사진으로 시작해서 둘의 로맨스를 부각하며 마무리하는 이야기를 계획했어요. 80세에 성공하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게 되었지만, 오래 사랑하던 이는 떠나고 없는 그런 쓸쓸함으로 끝을 맺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피크닉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요소가 있어서인 것 같아요. 강북의 훌륭한 레스토랑,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 흔치 않은 전시 콘텐츠, 소규모 공연 마니아, 문학 프로그램이 모두 있어요. 더 프라이빗한 커뮤니티를 만들거나 VIP를 위한 장소를 추구하는 미술관도 좋지만 피크닉은 좀 더 열린 공간이고, 앞으로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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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일상에서 큐레이션을 하는 시대입니다. 직업인으로서의 큐레이터는 어떤 모습으로 차별화할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보고 싶은 외국 영화 한 편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요즘에는 마음만 먹으면 다양한 콘텐츠에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됐어요. 누구나 제 취향을 드러내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 나설 수 있죠. 큐레이터는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합니다. 단순히 작품의 유명세를 넘어 깊이 있는 것을 보여주고, 그러면서도 잘 몰입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구성하고 조직해야 합니다.

이전과 다르게 중요해지는 것은 전체적인 경험을 만드는 일입니다. 어떤 F&B로 구성하고, 어떤 행사를 열고, 동선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까지 모두 큐레이션에 포함됩니다. 피크닉을 예로 들면, 옥상 공간을 고급 라운지 바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이곳까지 오는 전시와 이어지는 여정이 되기를 택했어요. 전시의 끝자락에서 한숨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화사한 숍이 나타나는 식으로 말이죠. 이런 장면을 만드는 것까지 큐레이터의 몫입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지금의 시대에 양질의 콘텐츠를 구분하는 시선을 키우기 위해 어떤 연습을 하면 좋을지, 조언을 한다면요.
경험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이유도 찾아보면서 자기 안에 꿈틀거리는 것을 돌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연히 극적인 순간이 와요. 그런 것이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마니아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열광하기도 하고요. 이러한 점들을 연결하려면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가 필요합니다. 선입견을 없애고 모든 것에 반응하도록 스스로를 좀 더 열어둬야 해요.

구체적인 조언이라면, 역사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미술에 관심이 있으면 미술사를, 음악이면 음악사를 파보는 거죠. 시티팝이든, 엠비언트 뮤직이든 모든 음악 장르는 그것이 나온 배경과 영향을 받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채 여기저기 쫓아다니다 보면 금세 길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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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닉Piknic
피크닉(@piknic.kr) 은 작가의 작품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던 기존의 전시공간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는 공간에 담겨있는 전시, 카페, 정원 등을 경험하고 나면 납득할 수 있다. 이는 관람객에게 총체적인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이 공간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디렉터의 의지가 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Be Curated’  전체 이야기를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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