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제주다운

[In your Area] ⑥ 재주상회 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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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윤정훈  사진. 윤현기  자료.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오늘날 서울 외 지역을 향한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수도권의 하위 개념(지방)으로 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수도권 집중의 대안이자 매력적인 지역 문화의 기반(로컬)으로 여기는 시각이다. 지역에 대한 역설적 시선이 공존하는 이때, ‹브리크› 11호 특집 ‘인 유어 에리어In Your Area’는 지역을 누군가의 일과 삶이 전개되는 터전이자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공간을 창출하는 근거지로 바라보고자 한다.
서울의 작은 동네 또한 하나의 지역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좀 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역의 전통과 문화, 자연, 심지어 결핍된 무언가를 토대로 조금은 다른 공간, 조금은 다른 문화를 일구는 크리에이터들을 조명했다. 미래 농업인들을 위한 도시를 꿈꾸는 기업인부터 문화 불모지 개척에 앞장선 건축가, 일상을 영위하는 장소로서의 도시를 문화적 유토피아로 만들고자 하는 기획자까지. 각 지역에 자리하게 된 저마다의 이유와 순탄치만은 않았던 과정, 그로 인한 변화를 가감 없이 전달한다. 

 

In your Area
① 헤테로토피아적 남해 – 헤테로토피아 최승용
② 이토록 멋진 농촌 – 진천 뤁스퀘어
③ 문화예술 불모지를 개척하다 – SOAP 권순엽, 장동선
④ 우리들의 오아시스 – 대구 미래농원
⑤ 공주, 작당을 위한 베이스캠프 – 마을호텔 박우린

⑥ 가장 제주다운 – 재주상회 고선영
⑦ 탄화 동판에 표현한 과거와 현재, 미래 – 울산 동네가게녹슨
⑧ 지역 특색을 반영한 로컬 스폿


 

제주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도 바람에 휘휘 나부낀다. 바람이 거세고 잦은 지역이기에, 보다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 제주의 말은 짧아지고 변형됐다. 예컨대 ‘오세요’는 ‘옵서’로, ‘있다’는 ‘인’으로. 제주에서 로컬 매거진을 만들던 고선영 대표는 우연히 할망(할머니)들의 대화를 엿듣다 제주 방언과 바람의 흥미로운 상관관계를 알게 됐다. 영감을 받아 다음호의 주제는 제주의 바람이 됐다. 제주 로컬 매거진 ‹인iiin(I’m in island now)›에는 이렇듯 사소하고도 깊은, 직접 살아야만 알 수 있는 제주의 숨겨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콘텐츠그룹 재주상회’는 로컬을 중심으로 출판, 브랜딩과 디자인, 상품 및 공간 개발을 이끌어온 기업이다. 제주를 제대로 다루는 매거진이 없다는 데서 출발해 꼬박 8년간 오직 제주의 이야기로만 채워진 잡지를 꾸준히 발행해 왔다. 그 여정에서 로컬 생산자와 협업해 상품을 개발하고 지역의 쇠퇴한 섬유 산업을 재조명해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브랜드로 재탄생시켰다. 나아가 비어 있던 농협 건물을 여행자와 주민을 잇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삼는 등 해를 거듭할수록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하나의 지역을 대상으로 이렇게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해낼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러한 콘텐츠를 탄탄히 뒷받침할 지역성은 어디서 발굴할 수 있을까? 재주상회 고선영 대표를 만나 제주와 로컬 콘텐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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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분위기가 무척 한산해요. 사계리는 어떤 마을이에요?

사계리는 제주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늦게 알려진 마을이에요. 마을 자체가 무척 안정적이라 변화가 더딘 편이죠. 드물게 농사도 잘되고, 가파도나 마라도로 갈 수 있는 운진항과도 가까운데 그 사이 물살이 무척 세서 방어가 많이 잡혀요. 또 상군 해녀가 많이 발달하는 곳이죠.

 

상군 해녀요?

물질 기술이 가장 뛰어난 해녀를 일컫는 용어예요. 사계리에는 비교적 소득이 높은 상군 해녀가 많아 마을 경제가 안정되고 부동산 거래가 많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외지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오기 어려웠고, 마을이 알려지는 속도도 비교적 느렸죠. 반대로 그 덕에 마을의 고유한 특징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하고요. 여행자로 제주에 와 로컬 매거진을 창간하고 지금의 재주상회를 만들었죠.

 

제주에 온 지는 올해로 얼마나 됐나요?

딱 10년 됐네요. 여행 기자로 줄곧 일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왔어요.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고, 1~2년 정도 살다 다른 도시로 옮겨가려고 했죠. 그러다 떠날지 더 머물지 결정해야 하는 때가 왔고 제주에서 아직 못 본 게 많다는 생각에 잠시 더 있기로 했어요. 여행자에서 여행생활자로 넘어가는 시점이었죠. 지금은 정착한 셈이나 다름없고요.

 

고선영 재주상회 대표 ©BRIQUE Magazine

 

여행 기자로 오래 일했다면 전국의 다양한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겠어요.

소도시에 특히 관심이 많았어요. 걸어서 쭉 둘러보기 좋고 적당한 인구가 사는 작은 도시에 흥미로운 콘텐츠가 많다는 것을 여행 기자 일을 하며 알게 됐죠. 2009년 소도시에 관한 책을 만들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여행자 관점에서 도시의 매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됐어요. 도시를 찾아온 사람들이 새로운 무드와 활기를 만들어내면 그것이 곧 그 도시의 새로운 무드를 형성하고, 이후 크리에이터들이 그 도시에 정착해 또 다른 콘텐츠를 생산하면 그 콘텐츠를 보고 더 많은 사람이 그 도시를 찾는 거죠. 지역과 지역의 자원, 크리에이터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하나의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에요.

 

그래서인지 매거진 ‹인›이 타깃으로 하는 대상이 여행자 혹은 지역민 어느 하나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읽을 때마다 ‘제주가 이렇게 이야깃거리가 많은 데였나?’ 싶을 정도로 흥미로웠고요.

매거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지는 좀 됐어요. 지금의 ‹인›에는 최정순 편집장과 에디터들의 시선이 더 많이 담겨 있죠. 저를 비롯한 구성원들은 다양한 시선으로 이 섬을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매거진이 추구하는 다양한 관점 역시 여기서 비롯된 것 같고요. 창간부터 유지해온 잡지의 기본 콘셉트는 ‘제주에 살며 알게 된 재밌는 이야기를 친한 친구에게 들려준다’는 거예요. 따라서 저를 포함한 에디터들에게 스스로 정말 재미있는지를 자주 묻곤 하죠.

 

공감해요. 무엇보다 만드는 사람이 흥미를 느껴야 좋은 콘텐츠가 나오는 법이죠.

독자들은 귀신같이 다 알거든요. 이 기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기사를 만들었는지를요. 자신에게는 물론 읽는 사람에게, 나아가 이 지역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만한 일인가 생각하며 아이템을 발굴하고 기사를 써왔어요.

©iiinjeju

 

그러한 재미를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지역 주민과의 생생한 교류에도 있다고 봤어요. ‹인›에는 직접 만나 전해 듣지 않으면 모를 이야기들이 가득하죠.

매거진의 기사는 온전한 창작물이 아니에요.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에 기대어 쓰는 거죠. 콘텐츠를 어떤 식으로 발굴하고 얻을 것인가 생각할 때, 결국 답은 사람에게 있다고 봐요. 꼭 이 시대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책 같은 기록물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에디터들은 지역 도서관에도 많이 가요. 별도로 마련된 지역 코너에서 취잿거리를 찾는 거죠. 오래된 책에서 건진 한 문장이 콘텐츠의 시작이 될 수 있으니까요. 또는 누군가가 바람처럼 흘린 몇 마디 문장이 모티브가 될 수 있고요.

 

기억에 남는 특집이 있나요?

제주의 바람에 관한 특집을 기획한 적 있어요. 산방산 탄산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요, 감귤 수확 철이라 동네 할망들이 일하고 쉬러 온 거예요. 할망들의 대화에서 ‘강 방 왕’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왔어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여행객들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었죠. 할머니들이 웃으며 ‘가서 보고 와’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냥 가서 보고 오라고 하면 되지 왜 강방왕이라고 하냐며 여행객들이 되물었어요. 그랬더니 연로한 할머니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바람에 말이 다 날아가고 강방왕만 남암쪄.”

 

바람에 날아가고 남은 말이라니!

이야기를 듣자마자 서둘러 돌아와 바람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제주도가 바람이 워낙 많이 불잖아요. 이런 환경에서 뜻을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해 어미가 앞말에 붙고 말이 짧아진 거예요. 바람이 제주 사람들의 언어와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죠. 제주에는 바람을 일컫는 단어도 수십 개에 이르고, 지역별로도 달라요.

 

정말 이곳에 살아 가능했던 콘텐츠네요.

제가 만약 그 목욕탕에 앉아서 그분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런 특집을 생각해내기 어려웠을 거예요. 새로운 콘텐츠는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시작돼요. 재주상회 콘텐츠의 핵심은 제주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지금 시대의 언어로 가공해 누구라도 흥미롭게 소비하도록 하는 데 있어요. 이러한 맥락에서 저희는 크리에이터보다 전달자에 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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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역성은 어디서 비롯될까요? 단지 오래된 것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 같아요.

오래됐건 최신이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성질이 지역성이죠. 문화적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지역의 문화는 계속 변화하잖아요. 이주자들이 원래 있던 문화와 동화돼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곧 또 다른 지역성으로 발전하기도 하죠. 반대로 어느 지역에서나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은 지역성이라 할 수 없을 테고요.

 

재주상회에겐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가 특히 중요할 것 같아요.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나요?

저희는 기본적으로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지향해요. (웃음)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진 않아요. 다만 누구든 만나면 항상 반갑게 인사하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더라고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부러 노력하지 않았어요. 다만 이 지역과 지역 사람들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려고 했죠. 제주도민의 삶을 존중하고 관찰하며 좀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너무너무 재미난 것들’이 저희 콘텐츠가 돼요. 잡지뿐만 아니라 로컬 상품과 유휴공간을 개발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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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플레이와 공동 기획한 사계생활은 어떤 공간인가요?

사계리로 사무실을 이전했을 무렵이었어요. 2017년 마을 농협이 외곽으로 이전하게 됐는데, 1년 만에 일대가 슬럼화됐죠. 안덕농협 사계분소는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며 은행 이상의 역할을 했어요. 사람들이 모여 농사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안부를 묻는 마을의 중심지였죠. 그런 곳이 없어지니 통행하는 사람도 줄고 문 닫는 가게도 늘어나면서 마을 분위기가 급격하게 썰렁해졌어요. 저 공간에서 재밌는 걸 해보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사람들이 늘 모이는 장소였던 점에 착안해 ‘마을 여행자를 위한 콘텐츠 저장소’라는 콘셉트를 구상했죠. 한 마을을 깊게 경험하길 원하는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지역 앵커 공간이에요. 라운지, 카페, 로컬 상품숍, 마을 콘텐츠를 안내하는 테이블이 있고, 서핑 스쿨이나 스테이를 안내하는 컨시어지도 겸하고 있죠. 올해 10월 리뉴얼을 준비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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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리 주민들도 사계생활을 찾나요?

어르신들이 자발적으로 방문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명절 때 손자나 자식분들과 함께 오는 경우는 종종 봤어요. 우리 동네에도 이런 게 있다며 자랑스러워 하면서요.

 

콘텐츠 중심의 프로젝트를 이어오다 공간에 주목한 계기가 있을까요?

저희에게 공간은 콘텐츠를 경험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사계생활은 유휴공간을 활용한 것이지만 지역 재생에 방점을 두고 있진 않아요. 콘텐츠를 경험할 수단이 필요하면 그것이 공간일 수도 서비스일 수도 있죠. 그래서 재주상회에겐 다양한 주체와의 협업이 무척 중요해요. 최근 재주상회가 출시한 한라봉 국수가 그러한 협업의 결과물이고요. 중문 농부의 한라봉, 거창 장인의 국수, 제주에서 짠 들기름, 셰프의 양념을 합친 제품이죠. 협업의 과정 없이 상품을 직접 만드는 일은 저희에게 큰 의미가 없어요.

 

지역 생산자들과 협업해 개발한 한라봉 국수 ©iiinjeju
사계절 크레용 ©iiinjeju

 

그러한 협업이 지역 내 리테일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해 보여요.

지금은 각자도생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에요. 같은 맥락에서 제주 기반 로컬 기업들의 브랜딩도 돕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제주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생겨나는 로컬 브랜드에 관심이 많아요. 포틀랜드처럼 한국의 로컬 브랜드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로컬을 기반으로 창작 활동이나 비즈니스를 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건넨다면요.

나만의 오리진origin을 갖는 게 무척 중요해요. 고유한 정체성이 없다면 성장할 수도, 오래 지속하기도 어려워요. 무엇보다 각자의 오리진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근래 들어 제주에 새로운 문화와 공간이 많이 생겼죠. 발전하는 만큼 고유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해요. 지금의 제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이 또한 자연스러운 변화로 여기고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해요. 예전엔 제주도에 이탈리안 식당이 들어서면 로컬 푸드 레스토랑이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주의 식재료에 대한 탐구와 노력이 수반된다면 그 또한 충분히 로컬 푸드로 인정할 수 있다고 봐요. 저는 제주를 예단하지도 전망하지도 않아요. 지금의 제주가 가진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할 뿐 판단은 독자의 몫이죠.

 

해녀 패턴 매트 ©iiinjeju
1950년대 만들어진 제주 로컬 브랜드 한림수직을 되살리는 취지로 제작한 스웨터 제품 ©iiinjeju

 

결국 ‘제주다움’은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겠네요.

맞아요. ‘제주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이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저도 제주에서 10년간 제주다움을 고민하고 있지만 여전히 어려워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늘 새로운 제주를 추구하고 제주다움을 꿈꿀 수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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