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내 집이었으면

[Stay here] ⑨ 더 나은 주거를 위한 스테이 ‘어 베터 플레이스’
ⓒBRIQUE Magazine
에디터. 김지아  사진. 윤현기  자료. 유즈플 워크샵

 

머무는 공간이자 장소를 뜻하는 오늘날의 ‘스테이stay’는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 새로운 경험을 제안한다. ‘여행’과 ‘집’, ‘머무는 것’과 ‘떠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재고하기를 요청받는 과정에서 스테이의 맥락은 폭넓게 재편되는 중이다. <브리크brique>는 이번 특집에서 공간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가치와 이야기가 명확한 여러 스테이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각 공간에서 건축가, 디자이너, 운영자가 제안하는 바는 결국 변화하는 동시대의 생활 양식과 닿아 있다. 자연 속에서의 휴식, 자발적 고립, 일과 생활, 스포츠와 문화 활동, 유려한 건축 공간에서의 비일상적 경험까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는 스테이의 궤적을 살피는 일은 이 시대 여행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과 다름 아닐 것이다.


Stay here
① 오늘의 여인숙 – 삼화 여인숙 
② 완벽한 고립의 시간 – 의림여관 
③ 세 가지 사색의 공간 – 서리어
④ 고요함 속 감각을 여는 호텔 – 이제 남해
⑤ 숲속 진정한 나를 마주하다 – 아틴마루

⑥ 호텔과 글램핑 사이 – 글램트리리조트
⑦ 일과 쉼이 공존하는 곳 – 오-피스제주
⑧ 꼭 하룻밤만큼의 예술 – 다이브인 인사
⑨ 여기가 내 집이었으면 – 어 베터 플레이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문득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원할 때, 그러나 일상에서 완전히 멀어지기엔 시간과 마음이 충분히 허락지 않을 때 우리는 도심 속 스테이를 찾는다. 으레 호텔이 유력한 선택지가 될 수 있지만 때론 도심이라는 익숙한 장소에 드리운 정주의 정서에 마음이 기울 때가 있다. 마치 파리의 어느 골목 이름 모를 숙소가 주는 생경한 안락함처럼 말이다. 종로의 상가 건물 4층에 위치한 ‘어 베터 플레이스a better place’는 한국 주거 문화의 연장선에서 더 나은 공간에 대한 디자이너의 고민이 담긴 스테이다.

 

ⓒBRIQUE Magazine

 

더 나은 주거를 위한 스테이
호스트이자 디자이너인 유즈풀 워크샵 문석진 대표는 근미래 주거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숙박 브랜드이자 주거 공간 브랜드인 ‘어 베터 플레이스’를 론칭했다. 목표는 서울의 주거 문화를 대표하는 아파트식 평면을 활용해 그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공간 구성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즉 일종의 프로토타입으로 주거 공간을 닮은 숙박시설을 만든 셈인데, 스테이가 위치한 지리적 맥락과 공간 디자인, 소프트웨어 등 세부 요소를 살펴보면 단순히 테스트 베드라기엔 짚어볼 구석이 많은 완성도 높은 스테이다.

 

다이어그램 ⓒUseful Workshop

 

종로 상가 4층에 위치한 이유
어 베터 플레이스의 첫 번째 객실 401호는 종로의 한 먹자골목 상가 4층에 자리한다. 현란한 네온사인의 식당과 호프집, 노래방 등 유흥시설이 밀집한 종로의 거리는 언뜻 스테이가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디자이너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비교적 명확했다. 서울의 옛 모습부터 변화하는 현재의 모습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처음 스테이를 계획할 당시에는 외국인을 타깃으로 설정해 서울역, 광화문 등 도심과 멀지 않으면서도 서울이라는 도시의 인상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중요했다. 그렇게 종로 일대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자리를 발견했다. 이 지역의 상가 건물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접근성이 좋은 1층을 제외한 위층 공실률이 높았고, 임대료 역시 저층부보다 위층이 훨씬 저렴했다. 그렇게 비어 있던 한 층을 임대해 숙박시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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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닮은 공간 활용법
일명 ‘꼬마빌딩’의 공실을 활용한 것이기에 한 층의 면적이 그리 넓지는 않았다. 층고 역시 높은 편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디자이너가 의도한 아파트를 닮은 공간에 가까웠다. 공간에 적용된 첫 번째 솔루션은 바로 모듈형 벽이다. 현재의 주거에서 아파트식 평면을 탈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이에 생활에 필요한 수많은 도구를 수납할 수 있는 모듈형 벽을 설치했다.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책꽂이, 환풍기, 전기배선 등 아홉 가지 기능을 갖춘 시스템으로 계획했고, 스테이라는 공간 특성에 맞춰 각 기능을 영역별로 필요한 곳에 배치했다. 또한 장방형의 평면을 크게 침실과 거실로 분할했는데, 공간을 구획하는 데는 벽뿐 아니라 중문 형태의 슬라이딩 도어를 활용했다. 아파트, 오피스텔, 원룸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공간의 벽면에는 모듈형 벽이, 한가운데엔 육중한 중문이 들어선 이 같은 모습은 생경하면서도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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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과 다른 공간 디자인
공간에서 침구류를 제외하면 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주거를 비롯해 많은 공간을 이루는 색이 화이트 톤이라는 점을 고려해 차별화 요소로 택한 전략이기도 하다.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되 유행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색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1920~40년대 유럽에서 쓰인 컬러칩을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도출해낸 색이 바로 버터 색에 가까운 온화한 노랑과 샴페인 빛을 닮은 주홍이다. 이처럼 채도 낮은 노란색과 붉은색을 각각 벽면과 바닥에 사용해 안락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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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바닥, 중문 등 공간을 이루는 굵직한 요소를 설계한 후에는 소파와 침대, 선반 등 가구를 직접 제작해 배치했을 뿐 아니라 손잡이에서 우산꽂이에 이르기까지 작은 요소까지도 직접 디자인해 하나하나 채워 넣었다. 이는 달리 말해 공간을 쌓아가는 일에 가까웠는데, 한낱 스튜디오 형태로 남게 될 공간이라면 이 같은 품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고려해 설계한 공간은 결국 이곳에 머무르고 나아가 더 나은 집을 꿈꾸게 될 사용자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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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제안하는 장소
더 나은 주거를 향한 고민은 좋은 스테이로 이어진다. 길든 짧든 생활의 형태로 머무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집과 스테이는 닮아 있기 때문. 디자이너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유형의 것뿐 아니라 무형의 것도 충분히 고려했다. 이를테면 공간에 들어설 때 은은하게 퍼지는 향과 음악 소리,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조도 등 사용자를 감각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머무는 동안 자유롭게 요리할 수 있는 식기구를 구비하는 데에서 나아가 음악 감상을 위한 헤드셋, 공간을 만드는 데 영감을 준 디자인 서적, 그리고 보드게임 등 놀이 요소를 배치해 소소한 프로그램을 더했다. 오직 투숙객만을 위해 작동하는 엘리베이터와 문패에 쓰인 그날그날 사용자의 이름, 공간 활용법이 적힌 안내문부터 스튜디오에서 자체 선별한 로컬 명소 큐레이션까지. 섬세한 디테일에 반응하는 요즘의 숙박객을 위한 소프트웨어마저도 완벽하게 준비했다. 어 베터 플레이스는 앞으로도 상가 건물의 공실을 활용해 302호, 504호 등 다양하게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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